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현전입소물 위시유식성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이유소득고 비실주유식
눈앞에 작은 물건을 하나 세워 이것이 유식성(唯識性)이라고 한다면
이는 소득심이 있는 것이므로 유식에 진실로 머무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 어떤 작은 물건이 나타났다고 인식하고, 그 인식하는 마음을 유식성(唯識性),
즉 원성실성이라고 말한다면,
이 유식의 작용에는 소득(所得)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므로 실(實)다운 유식(唯識)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앞에 아무리 작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를 구하는 마음 내지 의지하고자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이 곧 소득심(所得心)이다.
소득심이 있으면 사량심(思量心)이 작용하여 변계소집(遍計所執)이 일어나게 된다.
소득심에는 제7 말나식, 즉 사량심이 있고, 사량심에서 변계소집이 작용하게 된다.
변계소집이 작용하는 마음에서는 실다운 유식이 머물 수 없으니 변계소집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눈앞에 있는 작은 물건을 어떻게 보는 것이 유식성(唯識性)일까?
작은 물건이 있다고 보는 것은 본래 내 마음이 보는 대로 그 물건이 있는 것인데
탐심에 가리어 그 물건이 있는 대로 내가 본다고 착각하고 보는 마음이다.
내 마음이 보는 대로 그 물건이 있다는 말은
보는 사람의 마음이 노란 색안경을 쓰고 있으면 그 물건은 노랗게 보이고,
미운 틀을 가진 색안경을 쓰고 보면 그 물건이 밉게 보이니
실제 존재하는 물건과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이 보이는 것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그에 관심을 가지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색안경을 쓰고 있는 마음이 있는 한 유식성(唯識性)이 드러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 물건이 어떻게 비춰질까?
이 물건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성(空性)을 보는 것이다.
공성이란
그 물건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목적을 위해 여러 가지 사물이 합성되었고
그것을 만든 손과 기술, 정성 등이 이 우주의 운동과 인연되어 만들어진 것이고
혼자 만들어진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라고 깨닫고, 아공 법공 무아를 그 한 물건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색공(色空)이 보이는 것도 마음이 보는 것인데
이는 제7 말나식에 형성된 탐욕, 아집과 법집의 상(相)이 완전히 제거된 마음이니 이를 유식실성이라 한다.
두 수자(修者)가 한 깃발 아래서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다.”
“아니다. 바람이 깃발을 흔드는 것이다.” 라고 하며 언쟁을 하고 있는 곳에
육조 혜능선사가 그 옆을 지나가시다가
“깃발이 흔들린다는 것도 틀렸고, 바람이 깃발을 흔든다고 하는 것도 틀렸다.
이것 외의 다른 답을 내놓아라.”라고 하셨으나 수자들은 갑자기 멍해지고 말았다.
혜능선사가 원하였던 답은 무엇일까?
그 답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요 바람이 흔드는 것도 아니요,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 공안이 바로 유식(唯識) 사상을 바르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젊었을 때 대화 중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장마철에 산 계곡에 흐르는 물결이 세고 깊어 그 계곡을 건널 마음을 내지 못해 기다리고 있던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이 때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함께 산길을 가다가 이 여인을 만났다.
경허스님이 이 여인에게 왜 길을 가지 않고 서 있느냐고 물었다.
그 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허스님이 아! 이 물을 건너지 못해서, 라고 하면서 그 여인의 앞에 앉아 자기 등에 업히라고 하였다.
그 여인이 경허스님 등에 업혀 그 물을 건너고, 경허스님은 그 여인을 내려놓고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젊은 만공스님은 정말 황당하게 생각했다.
경허스님은 만공스님에게 가르치기를 여인은 독사와 같으니 마주 봐도 안 된다고 하시고
자기는 여인을 업고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히고 물을 건너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경허스님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나지 않았다.
앞서가던 경허스님이 만공스님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아시고 앉아 기다리는 사이에 만공스님이 가까이 와서 스님께 질문이 있다고 하면서 경허스님께 물었다.
여자는 독사와 같다고 쳐다봐도 안 된다고 하시고 어떻게 하여 큰스님은 여자를 업고 물을 건널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경허스님이 대답하시기를 나는 벌써 그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안고 있구나. 라고 하시며 길을 재촉해 떠났다고 한다.
이 역시 그 여인에게 허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경허스님에게 허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 광경을 보고 만공스님의 마음에 그 여인에 대한 상(相)이 그렇게 비췄으니 허물이 일어난 것이다.
그 마음의 상(相)으로 말미암아 그 사실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졌다.
이 27송에서도 수행자가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너무 급한 마음을 갖지 말고
좌차(座次)의 순서를 잘 따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