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라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의피전연피 사량위성상
다음, 두 번째로 능변(能變)하는 이 식(識)을 말나식(末那識)이라 한다.
[말나식은] 그것[제8식]을 의지하여 움직이고,
그것[8식]을 반연하여 사량(思量)하는 것으로 성상(性相)을 삼는다.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나
아뢰야식이 제1 능변(能變)식이고,
그 다음으로 능히 변화를 일으키는 식(識)은 말나식(末那識)이라고 부른다.
말나(末那)는 인도말의 음역이고, 의(意)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육식(六識)인 의식(意識)과 혼돈을 피하기 위해 주로 말나식이라 부른다.
의(意)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지(意志)를
그 본성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제6송에서 의지적(意志的) 본성을 설명하고 있다.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 의피전연피 사량위성상
의피전(依彼轉)의 피(彼)와 연피(緣彼)의
피(彼)는
제8 아뢰야식의 대명사이고,
주어 제7 말나식은 생략되어 있다.
말을 붙여보면,
제7 말나식은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움직이고
아뢰야식에 의지[반연]하여 사량(思量)하는 것을
성(性)과 상(相)으로 한다.
제8 아뢰야식에는 수많은 겁 동안 쌓여져온 생멸하는
수많은 인과의 종자가 함장 되어 있는데,
제7 말나식은 이 아뢰야식에 함장 된 업의 종자에 의지하여 움직이고,
이에 의지[반연]하여 사량하므로
이 함장식에 저장된 종자의 성질의 영향을 받아
제7식이 사량하는 성(性)과 상(相)이 결정되게 되어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유정(有情)은
누구나 죽기를 싫어하고, 건강하게 오래살기를 바라며, 자기를 사랑하고,
남이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며, 남보다 낫기를 바라고, 항상 불안하여
안정을 찾기 위해 무엇인가 요구하는 욕심(欲心)이 있다.
이러한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킬까하고 이리저리 재보는 성품을
성(性)이라하고,
이 성품이 구체적인 표상(表相)으로 나타날 때 이를 상(相)이라 한다.
어떤 사람의 제7 말나식의 사량(思量)하는 성(性)은
그가 사량하고 행동하는 습성에 따라 상(相, mode)이 형성되고,
그 상은 그 사람의 언행에서 표상(表相)으로 나타난다.
어떤 사람의 언행에서 그의 표상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고,
그 표상에서 그의 말나식의 상을 읽을 수 있다.
이 때 이 상과 그의 말나식의 성(性)은 같을 수도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이 사량하는 상(相)을 금강경에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했고,
이 상을 공하게 하라는 것이
금강경의 취지이지 말나식의 성(性)을 공하라는 뜻은 아니다.
말나식의 성에는
무아상(無我相)이 될 수 있는 성이 있기에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을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기적인 상을 가진 사람도
이기적이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량성(思量性)을 가지고 있으니
의식적으로 이기적이 아닌 언행, 즉 보시 행을 꾸준히 하다보면
그의 말나식의 상(相)이 보살상(菩薩相)으로 바뀌게 되어
그가 하는 언행으로 그 상이 표출되어 보살위의 추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7 말나식의 사량은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에 반연하여 사량하므로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관계는
말나식이 능연(能緣)이 되고 아뢰야식이 소연(所緣)이 된다.
말나식이 능변(能變)이고 아뢰야식이 소변(所變)이다.
심성(心性)을 바르게 하기 위한 수행적인 차원에서 보면
아뢰야식을 소연으로 하여 반연하는 말나식이 능변식(能變識)이므로
말나식을 제어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말나식이 하는 사량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법이니
아뢰야식이 말나식의 사량하는 성질을 좌우하는 입장에서 보면
아뢰야식이 능인(能因)이 되고 말나식이 소연(所緣)이 됨으로
아뢰야식을 제어함으로서 말나식이 제어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많은 종자들을 통틀어 업장이라 한다.
이는 업장 소멸하는 기도, 참선, 사경 등의 수행을 해야 하는 근거가 된다.
아뢰야식과 말나식의 관계를 또 다른 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아뢰야식 :
수많은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뿌려진 종자를
이 몸의 아뢰야식에 함장하고 있다가 연을 만나면 발아(發芽)한다는 설과
유사한 용어 중에는 DNA 혹은 유전인자 등이 있다.
유래된 어원이 다르기 때문에 얼마나 정확하게 제8식과 같은지는 모르지만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면에서만 보면 유사성이 있어
제8 아뢰야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前) 종자에 있는 DNA가 다음 종자로 유전된다는 설과 진화론(進化論)은
전생에 있었던 아뢰야식이 금생에 와 전생의 성품이 금생에 상속되고,
또 금생에 쌓은 성품이 다음 생으로 상속된다는 불교의 설과 유사성이 있다.
아뢰야식에 함장된 종자라는 말은
사람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쌓아온 경험에 따라
육체와 성격의 형성 및 변화가 있게 되는데,
사람마다 그 성격의 체성(體性)이 다른 원인이라는 말이다.
그 체성이 다르다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취향(趣向)이 다르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체성이나 취향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각자의 성품의 빛깔이 다르고 그 찐한 농도가 다르다는 말로 은유(隱喩)될 수 있다.
말나식 : 의피전(依彼轉),
말나식이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의 색(色)에 의지하여 움직인다는 말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있는 업의 색을 ‘나’라고 생각하고
나를 사랑하고,
그 나에 집착하여 나를 유지 및 증장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사량 및 그들을 취하려는 사량을 제8식에 반연하여 일으킨다는 말이다.
술, 담배, 노름, 마약 등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들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인(業因)에 의지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자기인줄 알고 그들에 집착하고 사량하는 것이 한 예이다.
명예, 재물, 색욕 등에 욕심내고 탐하는 것들도 모두 나를 사랑하고,
나를 남에게 들어내고자 하고, 존재를 인식시키고자 하며,
남보다 우월함을 보이고자 하는 아상(我相)에서 나오는 것이고,
자기를 내세우고자 일으키는 심한 사량을 아집(我執)이라한다.
그리고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의 색(色)에 의지해서
말나식에 나타난 색(色)을 법(法)이라 하고,
그 법이 실제로 있는 줄 알고 좋아하고 집착하는 것을 법집(法執)이라 한다.
‘나’라고 하는 나는 제7 말나식에 의해 이와 같이 조작된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대상도
말나식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의 색에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그 대상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드는 것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담배를 좋아한다 혹은 술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그럴만한 업인(業因)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되어있기 때문이고,
술 담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제8 아뢰야식에 그러한 업인이 없기 때문이다.
술 담배를 좋아하는 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그러한 자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계속 취하는 것을 아집(我執)이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담배나 술이 있다고 보는 것은
자기의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인(業因)에 의한 것이나,
그런 줄 모르고 그러한 담배나 술이 진실로 그와 같이 있다고 보는 것이
법상(法相)이고, 그들이 좋다고 계속 취하고자 하는 것을 법집이라 한다.
이러한 아상과 법상을 소멸하여
제7 말나식으로 하여금 진아(眞我)를 인식하게 할 수 있을 때,
제7 말나식은 참 나를 개별적인 ‘나’로 보기보다
일체중생의 일원(一員)으로서의 나를 보고 인식하고
더블어함께 즐길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정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