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기념관 건립에 대한 대불총의 견해 지난 4월 19일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총동문회 (회장 최승태, 이하 대불련)는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대불련은 이날 “송현광장은 불교계에 매우 의미있는 공간으로, 이승만 집권 시기 불교계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불교 탄압과 반 불교적 행위를 자행한” 이승만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며, “오세훈 서울시장은 불교계의 반대 표명에 대해 즉각 수용하기를 바란다”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열린송현녹지 광장이 앞으로도 반 역사적, 반헌법적 이승만 기념관 건립 대신, 시민을 위한 열린 광장으로 조성되기를 바란다”고 요구했다. 우리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회장 박희도, 이하 대불총)은 2월 23일 오세훈 서울시장이 “송현 녹지광장 부지에 이승만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이후 우리 불교계가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에 대하여 매우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지식인 불자들의 모임인 대불련마저 이승만 기념관 건립 반대에 나서므로, 우리 대불총은 불교계가 일부 반 이승만 물결에 휩쓸려 모처럼 범국민적 지지하에 추진되는 건국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을 끝까지 반대한다면, 자유대한민국
※ 이 글은 뉴데일리 홈페이지에 있는 글입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만들기-왜 한국인은 자기나라 위대한 지도자를 모를까글쓴이: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은 독재자였나 한국에는 이승만 박사를 악한 인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부패한 독재자라고 부르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나는 23년간 이 박사와 친교를 나누어 왔고 18년간 그의 미국내 고문 겸 대리인이었다. 이 박사를 비난하는 사람 중에는 나와 이 박사의 이러한 관계를 근거로 들어 내가 이 박사에 대해 지나치게 호의적이다고 비판하지만, 그러는 그들은 이 박사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박사는 과연 독재자였는가. 이 박사 재임시 한국 신문들의 지면에는 반정부적인 기사들로 가득차 있다. 비판자들은 이런 것을 근거로 이 박사는 재임시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지적하지만, 이는 이 박사가 언론자유를 폭넓게 허용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비판자들은 당시 AP 통신이 한국의 언론자유를 세계 네번째, 다섯번째 수준으로 평가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비판자 중에는 1952년 이 박사가 재선을 위해 강압적으로 헌법을 개정하고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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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왕년 음악인 - 안익태와 윤이상 韓 昇 助/前 고려대 교수安益泰(안익태, 1906-1965)지난 12월 5일. 여의도 KBS 홀에서 安益泰(안익태)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가 열렸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별로 홍보되지 않았던 이 날 행사였는데 웬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왔던지. 그 홀을 거의 매운 청중들을 보고 나는 놀랐다. 안익태 하면 사람들은 이 나라의 愛國歌의 作曲者이며 코리아 판타지라는 교향곡의 작곡자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해방 후 그는 고국에 돌아와서 활동할 것 같더니 외국생활이 한국보다도 더 편안했던지 해외 특히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돌아가신 음악인이다.한국의 애국가는 어떻게 평가 받으며 우리 국민들에 의하여 얼마나 愛唱(애창)되어 왔는가? 나는 이 애국가를 1945년에 처음으로 들었으며 음악시간에 배워서 알게 되었으며 그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이별할 때 흔하게 부르던 영국 민요곡에다 애국가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것 보다는 훨씬 모양새가 좋았으며, 안익태의 애국가가 국가로 불려진지 60년이 넘었다.어떤 사람들은 안익태의 애국가는 기독교 찬송가의 냄새가 난다고 말했지만 國歌가 경망스럽거나 달착지근한 曲일 수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