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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왕년 음악인 - 안익태와 윤이상

두 분의 왕년 음악인 - 안익태와 윤이상

두 분의 왕년 음악인 - 안익태와 윤이상


 


 韓 昇 助/前 고려대 교수


 


 


 


 


安益泰(안익태, 1906-1965)


 


지난 12월 5일. 여의도 KBS 홀에서 安益泰(안익태)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가 열렸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별로 홍보되지 않았던 이 날 행사였는데 웬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왔던지. 그 홀을 거의 매운 청중들을 보고 나는 놀랐다.



안익태 하면 사람들은 이 나라의 愛國歌의 作曲者이며 코리아 판타지라는 교향곡의 작곡자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해방 후 그는 고국에 돌아와서 활동할 것 같더니 외국생활이 한국보다도 더 편안했던지 해외 특히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돌아가신 음악인이다.



한국의 애국가는 어떻게 평가 받으며 우리 국민들에 의하여 얼마나 愛唱(애창)되어 왔는가? 나는 이 애국가를 1945년에 처음으로 들었으며 음악시간에 배워서 알게 되었으며 그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이별할 때 흔하게 부르던 영국 민요곡에다 애국가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것 보다는 훨씬 모양새가 좋았으며, 안익태의 애국가가 국가로 불려진지 60년이 넘었다.



어떤 사람들은 안익태의 애국가는 기독교 찬송가의 냄새가 난다고 말했지만 國歌가 경망스럽거나 달착지근한 曲일 수가 없지 않은가? 정통적인 國歌가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내는 사람도 있었으나 남북이 통일된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북한에 의하여 정복되지 않는 한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한민족은 지난 60년동안 한국 역사의 비약적인 中興期를 살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중요한 모임마다 국민들이 열심히 불러 온 노래였다. 격동하는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민족의 정서와 의지를 담아서 부른 애국가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는가? 실제로 이 가곡을 밀어내거나 대치할 만한 노래는 그리 쉽게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가곡은 안익태의 인간승리에 그치지 않고 한민족의 자랑이며 快擧(쾌거)라고 보아도 좋을 성 싶다.



나는 안익태씨를 1955년과 1960년에 서너 번 가까이에서 보는 기회를 가졌었다. 한번은 음악회에서 그가 교향악단을 지휘하고 또 인사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가 있었다. 또 한번은 1960년대 말인가, 1961년 초였던가. 외무부에 들렸을 때 그가 기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았으며 또 말하는 소리도 직접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받은 첫 인상은 메뚜기와 같이 너무 깡마른 편이었으나 강단은 단단해 보였다.



그의 음악연주도 인상적이었다. 한번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이었다. 내가 잘 아는 곡이었는데 얼마나 힘차고 멋이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지를 뻔한 충동을 억지하느라 힘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해서 <코리아 판타지>는 멋있는 부분과 약간 지루한 부분이 섞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좋았다고 하겠으나 베토벤만큼의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다만 애국가 부분과 합창이 나오는 부분은 그 교향시의 클라이맥스로 큰 감격을 안겨 주기에 족했다.



그 후 都下(도하)의 여러 신문에서는 안익태의 지휘와 작곡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었다. 안익태의 코리아 판타지는 차이코프스키나 기타 동구 불가리아 민요를 베낀 것이 아니냐? 한국의 민요부분도 자주 나오는데 그런 것을 굳이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등의 비아냥 소리였으며 지휘도 그 정도의 능력자는 한국에도 있으니 굳이 외국에서 퇴물된 노인을 모셔드릴 필요가 있는가 하는 투의 기사였던 것 같다.



偉人이나 英雄들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한국이외에서는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후 얼마 안가서 안익태가 외국으로 돌아갔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내가 추측하기에는 한국에는 안익태의 팬이나 지지기반이 너무 약한 편이어서 그런지 국내에서 힘을 쓰는 음악패거리에 의하여 밀려나서 한국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구나. 안됐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20년이 흐르고 안익태 선생이 스페인에서 作故(작고)했으며 그에게 스페인의 처자가 남아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보도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얼마 전, 12월 5일 KBS 홀에서 열린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우연히 참석하게 된 것이다. 나한테 그런 소식이나 초대장을 보내주는 사람도 없는데 우연히 최서면씨가 초청장을 보내왔기에 옛 친구와 같이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공연장에 나갔으며 그동안 관심도 갖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던 여러 가지 사실들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안익태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傳記(전기)와 사진첩들 그리고 안익태의 음악생애를 담았던 영상자료도 나로서는 처음으로 접할 수가 있어 기뻤다. 박은성씨가 지휘했던 KBS 심포니도 내가 못 들었던 마요르카라는 교향곡도 선보여 주었다. 그것이 작곡되기는 1948년이었으나 한국에서는 初演(초연)된 작품이라고 하니 그는 그만큼 고국에서 대접받지 못한 인물이었음을 증명한다.



어찌했던 이번의 안익태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를 통해서 가졌던 생각을 여기서 요약 정리해 보겠다. 안익태 선생은 조선이 국권을 상실한 을사보호조약 바로 다음해인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나라가 극도로 암울해진 시대적인 환경에서 탄생하고 성장하였으니 그의 생애와 운명이 평탄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 집안의 家系(가계)는 순흥 안씨이며 빈농의 신분으로 지내왔다가 평양 상인의 딸인 그 어머니 덕으로 평양으로 이사 올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여러 가지 상업에 종사한 덕분에 7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난 익태 소년도 비교적 옹색하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날 수가 있었다. 그 3남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질을 보였으므로 그 가족들의 지원과 격려를 받는 가운데 음악수업에 專念(전념)할 수가 있었던 것이 유일한 행운이었던 것 같다.


 


그 암울한 시대를 반영하여 중학교 때 일본인 교사를 추방하는 등 반일행위에 앞장섰던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어려서부터 일본 관헌들의 주목과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10대의 어린 나이에 그의 형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동경으로 피난가서 일본인 중학에 다녀야 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시작했던 외로운 객지생활로 인하여 그의 祖國愛는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박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상상해 본다.



1926년 그는 동경국립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베르그 마에스터 교수에게 첼로를 배웠다. 1930년 3월에는 음악학교를 졸업하여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일본경찰의 감시와 압력으로 인하여 음악활동도 여의롭지 못함을 느끼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때는 그의 부친도 작고한 후라 경제형편도 어려워졌으므로 이때부터 그는 돈을 직접 벌면서 음악공부를 계속했다. 미국 신시나티 대학 음악과에 입학하였고, 1932년에는 신시나티 오케스트라의 첼로 제1주자로 발탁되어 돈벌이를 하며 지낼 수가 있었다.



그는 또 다시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였다. 여러 가지로 매우 어려워진 상황에서 作曲까지 공부하게 된 동기도 음악을 통한 愛國運動을 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스토코프스키 밑에서 지휘도 공부했는데 그가 곧 부지휘자로 선임될 수가 있었던 것도 그의 능력과 노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1935년 7월 커티스음악원을 졸업하면서 한국환상곡을 완성한 것을 보아도 그가 왜 작곡을 공부했는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애국가를 작곡하기 앞서서 세계의 70여개국의 국가를 수집하여 검토하며 연구를 거듭했다는 것도 그의 정열과 투지를 말해 준다. 그 작곡 콘테스트에 출품하여 入選(입선)의 영예를 안았지만 그 작품을 카네기 홀에서 연주하는 절차를 겪는 동안에 그는 합창 단원에게 애국가를 한국어로 부를 것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여 분개한 나머지 연주를 포기하고 카네기 홀을 걸어 나왔다. 이것은 안익태의 고집이나 성깔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하겠다.



그 후 안익태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를 다니면서 세계의 유명한 작곡가들과 친교를 맺으며 작곡도 더 배우고 또 세계적인 명지휘자 바인가르트너를 비롯하여 명지휘지들로부터 지휘법을 더 연마하였다. 그리고 1938년부터는 유럽과 기타 지역의 세계 유수한 심포니와 협연 또는 지휘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계속 쌓아 나갔다.



안익태의 인생 최고의 해가 바로 이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이런 세계의 정상급 심포니를 지휘하는 일본인이 없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일본은 안익태가 일본인임을 애써 강조하며 홍보하였다. 그러나 세계 2차대전의 戰禍(전화)를 피하고자 스페인으로 갔고 바로세로나 심포니를 지휘하다가 그는 마요르카라는 휴양지에 심포니를 창설하여 상임지휘자로 지내며 1965년 환갑도 되기 전에 病死하였다.



안익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겠다. ① 안익태는 세계적인 천재음악가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한국인으로서는 20세기 전반기에 국제무대에서 활약하였던 가장 우수한 정상급 음악인이었다. ② 日政下의 어려운 식민지 상황에서 꾸준한 노력과 강력한 의지력으로 역경을 돌파하면서 세계의 정상급 심포니를 지휘할 수가 있게 된 것을 보면 그의 대단한 의지력과 재능을 볼 수가 있다. 특히 日政하에서 그의 애국심과 동포애를 담은 코리아 판타지라는 곡으로 한국문화와 기백을 세계각지에 울려 퍼지게 한 것은 장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③ 그러나 그의 재능과 노력, 애국심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공헌에 비한다면, 질투심이 많은 한국의 음악계로부터 그에 대한 푸대접과 냉대 그리고 방해공작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는 60세로 접근하면서 고국으로 돌아와서 여생을 마치고 싶어 했으며 국제음악제를 두 번이나 유치하느라고 애를 썼다. 그러나 주변의 방해와 비 협조로 만족스러운 성과도 얻지 못했으며 스페인의 벽지 섬으로 로 돌아가서 쓸쓸히 살다가 1965년 59세의 나이로 그의 생을 마쳐야 했다.



본래 小人들은 패거리 짓기를 좋아한다. 소인들이 설쳐대고 패거리들이 勢道(세도)를 부리는 나라에서는 무엇이나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다. 聖人(성인), 君子(군자), 偉人(위인)들이 힘을 쓰지 못하며 野(야)에 파묻히거나 역사의 격류에 쓸려 내려가고 만다. 요즘은 또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패거리를 지어서 人才(인재)들 名聲(명성)에 오물을 끼얹거나 재기불능할 정도로 상처를 입힌다. 그러면서 마귀 요물들을 영웅 偉人(위인)으로 둔갑시켜서 사회를 혼탁하게 만든다. 안익태를 친일행위자로 깎아내린 것도 이 나라의 좌경세력이 만들어 놓은 한국의 불행한 사회풍토가 아니었던가?


 



尹以桑(윤이상, 1917-1995)


 


국제적으로 크게 명성을 날리다가 또 불행하게 돌아가신 분으로 윤이상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윤이상은 일본 오사까 음악학교 졸업생이며 그가 일찍이 한국의 음악계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해방 후의 사회혼란과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해방 후 한국에서는 金順男이 좌경된 조선음악가동맹의 위원장으로써 활동하다가 越北하였는데 내 추측으로는 윤이상도 그와 같이 활동하다가 좌파가 탄압을 받는 환경에서 자기의 고향 경남 통영으로 내려가 은신하면서 한국전쟁을 넘겼지않은가 생각이 된다. 그는 통영에서 여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지냈지만 50년대 초에 이미 작곡자로서 실력이 인정되고 前途(전도)가 촉망되었던 한국의 중견 작곡가로 인정받았던 것 같다.



그는 뒤늦게 1956년 39세의 나이 프랑스로 유학가서 3년을 보냈고 그 후 베를린 음대로 옮기면서 현대음악의 작곡자로서 그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어 왔으며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고 복역하다가 독일과 유럽의 여론과 외교적인 압력으로 풀려나서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71년에 국적을 바꾸고 독일로 歸化하였으며 1970-85년까지 베를린대 작곡과 교수를 지냈다. 1973년에는 독일예술원의 종신회원이 되는 영예도 차지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가 전공했던 現代音樂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므로 윤이상에 대한 글은 짧을 수밖에 없다. 윤이상은 크고 작은 실내악 등 천 여곡이나 되는 많은 작곡을 하였는데 그의 대표작 하면 한국과 일본의 고대음악을 현대음악으로 재조명한 禮樂(예악)이 있고 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곡으로 위촉받아서 작곡하였던 <심청>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사실만 보아도 독일에 있어서의 그의 位相(위상)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는 1968년 한국에서 감옥살이 하는 동안 <나비의 꿈>을 작곡하였으며 1981년에는 <光州여, 영원하라>, 1987년에는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는 교향곡이 그의 직접 지휘로 평양에서 초연된 바 있었는데 아마도 안익태의 <코리아 판타지>와 맞먹는 비중의 작품으로 만들어졌지 않은가 생각된다. 1994년에는 이른바 민주화투쟁과 통일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죽은 넋을 기리기 위해 작곡한 것이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인데 필자는 이 곡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이 곡목과 관련해서 연상되는 것이 모짜르트의 鎭魂曲(진혼곡)이다. 모짜르트는 그가 요절하기 전에 어떤 높은 이의 죽음을 기리는 진혼곡을 만들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때는 도저히 그런 곡을 작곡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무리하게 작곡하려고 과로하다가 병을 얻어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작곡하였다는 그 진혼곡이 不朽(불후)의 걸작이 되어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필자는 윤씨가 그 정도의 대천재 음악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작품이 나오고 나서 그도 일년 후에 죽은 것을 보면 윤씨에게도 적용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면서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윤이상의 최고 大作일 심청을 듣고도 유감스럽게도 전혀 호감이 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거부감이 느껴졌던 이유는 그의 현대음악에는 너무나 뚜렷한 인간 煩惱(번뇌), 특히 고국에 대한 극도의 怨恨(원한)으로 오염되어 크게 일그러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윤이상의 작곡이 왜 외국의 음악인들에게 높이 평가되었는가? 흔히들 사람들은 말한다. 윤이상의 음악은 한국적인 정서와 서양음악의 기법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서양사람들은 색다른 것, 새로운 것, 특히 동양적인 것이면 무엇이든 일단 좋아하고 보는 버릇이 있다. 윤이상이 보여주는 색다른 음색, 박자 그리고 한국적인 멜로디가 그들에게 너무 새로워보였기 때문에 크게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아쉽게 생각된 것은 내 귀에는 심청이의 눈물겨운 무한한 아름다움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작곡자의 증오와 원한으로 일그러진 마음으로 인하여 표현이 때로는 일그러져서 너무 과장되는 것도 같고, 또 왜 시도 때도 없이 우악스러운 轟音(굉음)을 일으켜서 듣는 이의 마음을 놀라게 하며 불안하게 만들며 긴장을 조성하는가? 저 사람이 무엇 때문에 한국의 沈淸을 소재로 잡아서 저런 음악을 만들어냈는가 하는 생각도 나의 무지와 편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직관도 그리 만만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나는 윤이상이라는 재주 많은 유능한 음악인이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어려운 사회현실로 일그러지고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의 불우하고 불행했던 정치사회현실이 윤이상의 마음을 음악 그 자체보다도 정치 쪽으로 더 기울어지게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또 한편 유럽에서의 윤이상의 명성도 그의 예술작품에 대한 선호 못지않게 그에 대한 부당한 체포와 납치라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서양인들의 동정 때문에 영향 받은 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한국에 잡혀 와 매우 거친 대접을 받은 개인적인 원한이 1972년에 한국의 國籍(국적)을 버리고 독일로 귀화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害惡(해악)에 대한 원한이 과도의 親北활동으로 폭발하여 김일성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임을 듬뿍 듬뿍 받으면서 활동했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특히나 유럽 특히 독일의 한국인들을 친북조직으로 끌어들이며 북송하는 총책 내지 대리인 노릇을 계속해 왔다는 것이나, 북한에서 6-70년대에 윤이상을 애국자 또는 영웅으로 만드는 영화를 세 편이나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듣기에 너무나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평양에 가 있을 때마다 김일성의 별장을 자기 집 드나들 듯 사용하였다고 하니 그런 사람에게 무슨 순수한 현대음악의 작품활동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 윤이상에게 매우 불쌍하다는 연민의 情을 느끼게 된 것은 그의 최후 때문이었다. 1995년 그는 오랜 客地생활을 끝내고 고향에 와서 생애의 최후를 마칠 희망을 가지고 돌아오려고 한 것 같으며 실제로 병든 몸을 이끌고 동경에 와 있었다. 당시는 김영삼 정권의 시기였으므로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아무런 견제나 제약이 있었을 리가 없었는데 그는 또 정치적인 쇼를 벌였던 것이다.


 


즉 김영삼 정권에게 남한정권이 자신을 東伯林)사건으로 납치 고문한데 대하여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러기 전에는 한국에 입국하지 않겠다고 협박하였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권도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왜 공개사과를 해야 했겠는가?



그런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나는 너무 딱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필시 윤이상 자신의 요구가 아니라 북한당국의 術策(술책)이며 指示(지시)일 것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늙고 병들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다면 그냥 고향으로 돌아올 일이지 왜 귀향문제까지도 북한의 지시를 기다리며 억지 쇼를 부리려고 들었던가? 윤이상은 남한정부의 사과를 기다리다가 동경 호텔 방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寃鬼(원귀)가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 온 셈이다.



오늘의 문제는 북한을 모방추종하려는 남한정부의 작태이다. 북한이 윤이상을 민족의 영웅으로 추켜올리며 윤이상음악당을 크게 만들며 여러 가지 국제행사를 벌이는데 호응하여 보조를 맞추고자 과잉행동을 계속 하는 것이 내 눈에 거슬린다.



이에 관한 기사를 2006년에 간행된 <대한민국 적화보고서>에서 인용해보겠다. “1967년 동백림사건의 주역으로 反韓親北(반한친북) 활동을 벌여온 底음악가 故윤이상은 노무현 정권에 들어 국가적 追慕(추모)의 대상이 됐다.” “문화관광부는 경남 통영시에 설립될 윤이상국제음악당 건립용역비 10억원을 포함한 지원비로 총 50억원을 2006년도 예산에 계상했다. 통영시가 작성한 윤이상국제음악당 건립계획안에 따르면, 음악당 건립비는 총 480억원이며(國費가 240억원, 경상남도 道費와 통영시비가 각 120억원씩 책정되어 있다), 따라서 문광부가 2006년 예산에 반영된 50억원 이외에도 190억원의 국비와 240억원의 도비, 시비가 추가로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 이후에도 1995년11월 사망 시까지 북한을 계속 오가며 ‘민주사회건설협의회 회장’, ‘한민련(민족민주통일해외한국인연합 )구주 본부의장’, ‘한국학술연구원 원장’, ‘유럽민협(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고문’ 등 친북반한 성향단체에서 활동해 왔다. 중앙정보부는 일찍이 윤이상에게 간첩죄를 적용했는데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을 거부하고 짓밟으려는 친북운동가였나?



윤이상과 북한정권의 연계성은 1992년 ‘오길남 간첩사건’과 1997년 황장엽 前 북한노동당서기 입국 당시 재차 확인됐다. 윤이상은 북한과 연계하여 오 박사의 입국을 적극권유 및 주선했으며, 갖은 협박을 하며 북한으로의 재입국을 권유했음이 밝혀졌다. 그러는 과정에서 말을 안 들으면 그의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안익태처럼 더 대접받아야 할 사람이 대접 못 받고 그럴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사람에게는 과분의 대접을 하는 불균형 사회가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참고자료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