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금에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내가 그동안 입어왔던 해묵고 색바랜 낡은 내복과 승복을 골라 대형 쓰레기 봉투에 넣어 쓰레기 수거장에 버리고, 나의 첫 번째 재산이며 읽고 또 읽은 헌책을 골라 필요한 단체에 보내고, 또 쓰레기 소각장에 처분하고 있다. 언제고“ 빈손의 몸만 세상을 떠나면 된다”는 생각에서 나의 주변 정리를 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을 준비하는 원인은, 나의 지병에 대해 한국의 명망있는 대학병원의 여기저기에서 친절한 전문교수로부터 조언을 받아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승려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이고, 법계(法階)는 종사(宗師)급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비구, 비구니 모두 결혼하지 않은 독신(獨身)을 원칙으로 한다. 나는 조계종 승려의 원칙대로 결혼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에게 처자(妻子)가 있을 리 없다. 나는 혼자서 세상을 살다가 떠날 뿐이다. 나는 6,25 전쟁 때 인민군의 접령지역인 전북 고창군 고수면 어느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나의 향리에서는 인민군의 백을 믿고 설치는 토착 빨갱이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평소 미운 털 박힌 이웃들을 “인민재판”이라는 명분으로 죽창과 몽둥이 등으로 마구 죽이는 시절이 있었다.
나는 오직 ”자유대한수호’와 서민경제발전과 서민복지 향상을 위해 기도하며, 글을 써온다. ” 한반도는 솔직히 역사상 단 한번도 자주독립을 해보지 못한 한(恨) 많은 땅이다. 남쪽에서는 일본군이, 북쪽에서는 중국군이 크게는 4년마다, 작게는 2년마다 야밤에 침략해온 것이 931회이다., 나는 언제인가, 한반도에 영웅이 태어나 자주독립국가를 건국하고 운영하는 호시절(好時節)이 도래하기를 기도한다. 한반도 자주독립국의 소망을 이루려면, 먼저 한반도인들이 구심점(求心點)을 만들어 뭉쳐야 한다. 일본의 천황같은 구심점 말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피를 토하듯 국민에 외치는 구호인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씀은 한국인의 영원한 교훈이어야 할 것이다. 작금의 한국정치는 민주를 외친지 70년이 흘러도 여전히 영호남의 지역싸움으로 선거를 한다. 중국은 한반도에 1천년의 역사를 두고 상전국 노릇을 하면서 재물과 처녀들을 조공받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누렸다. 중국군은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군에 패하여 한반도에 축출되었다. 승자인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는 통감부, 또다른 이름으로 ‘조선총독부“ 를 두고 총독이 통치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은 대동아공영(
국제사회에 한국이 세계 1위로 자살자가 많은 나라로 9년간 통계로 전해오는 보도로 전해온다, 자살자의 대부분이 경제난이 수위이다. 한국인으로서 국제사회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이다. 무속적으로 표현하면 한국에 무슨 악귀가 빙의(憑依)되어 젊은 남녀들이 대책없이 죽어가는 것인가? 한국에 특히 정치계, 종교계, 교육계는 각성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한국을 신명나게 살 수 있는 사상을 국민들에게 뇌리에 각인시켜주어야 하는 데, “그들은 홍귀에 빙의되었는가?” 자살자가 많은 한국을 혁명적으로 변혁시키는 데 역부족인 것같다. 한국에 한국인의 자살자가 많은 이유는 갖가지이다. 남녀의 사랑에 실패해서, 사업에 실패해서 아니면 다른 이유로, 그러나 가장 많은 자살자의 아유는 한국의 빈부 차이의 고통에서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도저히 자신이 경제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개탄 끝에 “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나자!” 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제일 많았다. 예컨대 서울 뚝섬 유원지 쪽 한강 대교에서 1년이면 1300∼1500여 명이 깊은 밤에 울면서 한강에 투신한다는 한강 쪽 ‘대한불교 조게종’소속의 수상법당에서 증언하는 바이다. 그 외 전국에서 자살하는 것이다. 자
한국의 서민들은 전국적으로 단결하여 봉기하여 文정부와 여당에 강력히 혁명하듯 저항할 때가 되었다. 文대통령은 자신이 주야로 노심초사(勞心焦思)로 돌보아 주어할 국민과 서민보다는 북의 김씨왕조에 충성하는 정책을 “평화”라는 명분으로 헌신적으로 실천해 보인다. 어찌보면 文대통령은 혈맹의 한-미 동맹보다는 북-중-러에 헌신하는 정책을 수행해 보인다. 文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직을 이용하여 첫째, 국민의 혈세를 수탈하듯 하여 대북퍼주기에 바치는 정책과 둘째, 북-중-러를 위하는 정책을 수행하려 한다. 한국과 러시아에 철도를 놓고, “러시아산 가스를 쓰기 위해 장거리 가스관을 국민 혈세로 건설하겠다” 호언하고 있다. 한국의 재벌들은 대한민국 수호에 앞장 서는 보수우익 운동에 재산을 기부하지 않고, 해외에 빼돌리기 바쁘다는 항설이다. 한국의 애국자는 서민들이다. 오직 경제난으로 죽어나는 대상은 서민둘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서민들은 살기위해서는 단결하여 봉기하여 文대통령에 저항 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서민들은 “한국정치를 변혁시키는 의병(義兵)”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한국의 진정한 서민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농어촌 빈민들은 단결하여 봉기하여 대한민국을
▲홍귀에 빙의된 중국 여학생들 홍귀(紅鬼)는 마르크스의 저술과 깅연에 본성을 잃고 마르크스의 의도대로 즉 “홍귀(紅鬼)에 빙의가 된 공산당, 사회주의 추종자들을 지칭한다. 어떤 남녀는 마르크스 저작인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등을 탐독하고는 마르크스의 반정부 폭도의 “피바다” 사상으로 민중을 선동하고 권력을 잡으려는 또하나의 무서운 홍귀가 되어 버린다.” 또한 세계 각지의 홍귀들은 기원(起源)의 고향인 러시아와 중공과 북의 김씨 왕조에 칭송과 영혼을 바치게 된다. 마르크스는 유대인이다. 기독의 예수도 유대인이다. 예수는 자신이 전지전능한 우일신의 독생자라고 주장하고, 마르크스는 냉소하고 “종교는 마약일 뿐이다”고 주장한다. 지구촌은 예수와 마르크스의 주장으로 데죽음을 당하고 언제 혼란과 상호 도륙이 끝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마르크스는 학자와 잡지사의 기자로서 활동을 해왔지만, 기득권의 사회에 증오와 저주심으로 반정부를 일으키는 글들을 많이 집필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는 너무 가난의 고통을 당했기에 부유한 자에 증오와 저주를 보내는 글을 썼다. 마르크스는 체포하려는 관헌을 피해 이 나라 저 나라 도망다니는 신세를 자초하다가 은신하여 ‘자본론과 공산당선언’ 등을
총알같은 속도로 태양을 윤회하는 이 지구에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제행무상으로 사라질 뿐이다. 세계 제2의 규모의 미군기지를 팽택에 주한미군이 마련할 때, 일부 한국인은 너무 심한 극렬한 반대의 폭력시위를 벌였다. 세상에 영원한 제국주의 군대는 없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로마군과 징기스칸군, 그 외 제국주의 군대는 인연이 다하면 지구에서 사라졌다. 주한미군 철수는 언제인가? 한국과 인연이 다한 것을 깨닫게 되면, 워싱턴은 스스로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할 전망이다. 주한미군이 스스로 철수하기 전에 일부 한국 좌파 국민들은 집요한 반미운동과 미군철수 운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일부 대학생들이 더욱 심하다 미군철수론자 가운데 특히 친북 정치인과, 친북 언론인. 친북대학생, 친북 노동자, 친북 학자들, 친북 종교인들이 집요하게 반미와 미군철수를 외치고 운동하고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주권국가를 위해서”라고 외치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을 분석해보면 중-러-북이 외쳐온 주장과 구호의 복창이었다. 친북 대통령에 돈으로 포섭된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주한미군은 언제 무슨 이유 때문에 한반도에 진주했는가? 미군이 오기 전에는 중국인 청군(淸軍)이 한국의
과거 6,25 전쟁 시절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믿고 자유대한을 수호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와 목숨바쳐 싸운 대학생은 분명 존재했었다. 6,25 전쟁 때는 재일교포의 대학생들까지 조국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총을 들고 김일성의 군대, 중공군의 군대와 맞서 싸우워 죽고, 상이용사가 되었다. 국내에는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총을 들고 공산군에 맞서 싸워 죽었다. 그 때는 자유대한을 수호하는 보수 우익학생들인 고교, 대학생들, 일반 젊은이들은 분명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일부 대학생총학회는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할 때마다 “독재타도”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구호는 거의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6,25 전쟁에서 미군과 함께 한국을 지켜낸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매도하고, 주한미군을 축출하는 운동으로 돌변했다. 일부 운동권 대학생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향해 가열차게 만고의 역적으로 매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권력이 바뀌는 때마다 아부의 찬사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부르곤 하는 일부 대형 언론사나 소형 언론사는 다투워 시위 대학생들을 민주주의 전사라고 칭송했다. 그런데 시위 대학생들의 구호
▲생전의 이방자여사 이방자(李方子)여사는 조선 말기 의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妃), 영친왕비(英親王妃), 영왕비(英王妃)를 말한다. 나는 이 추억의 이 글에서는 본인이 생전에 나에게 바라는 호칭인 이방자 여사로 적는다. 이방자여사는 나와 만날 때마다 고국 “사쿠라 꽃이 아름다운 일본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녀는 일본천황의 칙령(勅令)을 받아 영친왕비가 되었고, “귀국하라”는 칙령이 있어야 귀국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방자여사의 ”영혼이라도 귀국하라“는 칙령이 있기를 바라면서 이방자여사와의 추억과 약속의 글을 적는다. 이방자(李方子)라는 이름은 일본식 원래 이름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에서 성(姓)인 나시모토를 뗀 방자(方子)에서 신랑의 성(姓)인 이(李)를 붙여 이방자(李方子)로 칭하는 것이다. 나는 1978년 10월 1일자로 대한불고 조계종 기관지인 대한불교(훗날 불교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당시는 윤고암(古庵) 종정 때이다. 다음 해 정초, 어느 날, 나는 이방자여사에 대한 이야기로 연재물을 집필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방자여사가 기거하는 창덕궁 안에 있는 낙선재(樂善齋)를 찾았다. 금남(禁男)의 낙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