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잎잡이 육사 출신 박승춘 보훈처장박승춘이 장지연 선생 등 19명의 독림유공자로부터 유공자 훈장을 박탈했다. 이에 독립유공자 강영석 김우현 씨의 후손이 소송을 제기했다. 2011년 12월 26일, 서울행정법원은 보훈처장 박승춘이 도둑행정을 저질렀다고 볼만한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들에게 훈장을 주는 사람도 대통령이요, 이들로부터 훈장을 취소하는 것도 대통령의 권한인데 보훈처장이 행정을 잘 모르는 국무회의를 거쳐 유공자들로부터 훈장을 박탈한 것은 위법이라는 것이다. 2012년 1월 20일, 장지연의 후손이 제기한 소송에서 행정법원은 역시 ‘헌법 제80조와 상훈법 제7조에 훈장 수여는 대통령이 결정하는 것으로 명시돼 있으므로 서훈 취소 역시 대통령에게 권한이 있다. 대통령이 아닌 보훈처가 서훈 취소를 결정한 것은 무효’라 판결했다.보훈처가 이러한 파행을 저지른 것은 보훈 심사위원 6명 중 5명이 빨갱이라는 데 있고, 보훈처장 박승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서 기인한다. 여기까지 보면 보훈처는 빨갱이 편이다.보훈처는 인민공화국 보훈처6.25 참전 용사에겐 월 9만원, 골수 거물 빨갱이 한민통 베트콩 곽동의에게는 월 100만원을 지급해왔다. 보훈처는 인민공화
전라남도 사람들은 빨갱이 김대중을 신으로 모신다.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에서 국회의원을 하려고 일부러 자기가 오물을 마구 배설해 놓고 그것을 떠다가 상대방 후보의 옷에 묻혀 상대방을 모함하는 일들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자기 당원으로 하여금 자기당원을 때려 피를 흘리게 만들어 놓고 그걸 사진 찍어 상대방이 했다고 모함했다. 상대방 완장을 차고 다니며 불법을 저질러 놓고 이를 사진 찍어 상대방이 했다고 모함했다.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많다. 전남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런 김대중을 좋아 한다. 전남사람들은 김대중의 복사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전남사람들은 한국사회 전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딸 가진 부모는 절대로 전라도 남자친구들을 떼어놓으려 한다. 김대중은 물론 대부분의 전남 사람들은 북한정권을 참으로 많이 닮았다. 북한은 5.18때 광주에 특수부대를 대거 보내 전라남도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김대중 처럼 오물을 배설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오물을 공수부대와 전두환과 미국의 옷에 덕지 덕지 발랐다. 김대중이 강원도 인제에서 했던 행동과 단 한치도 어긋나지 않고 닮았다. 이게 바로 빨갱이들 사이에 일관 되게 통하는 수법이다.해방공간의 제주도 사
아래는 5월 9일 및 11일 독일 베를린에서 대통령과 청와대 관계자가 밝힌 내용이다. 핵포기 문제에 대해 북한이 진정하게, 확고하게 포기하겠다는 의견을 국제사회와 합의한다면 내년 3월 26~27일 핵정상회의에 김정일 위원장을 초대하겠다. 북한이 비핵화에 합의를 하면 북한에 대해 안전보장과 함께 경제적 지원을 할 것이다.안전보장은 북한이 가장 원하는 한반도 평화협정 등을 의미하며 이는 북한이 진행하고 있는 3대 세습체제, 말해 김정은으로의 권력이양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다. 위 발언들에 대해 세간에서는 이명박이 레임덕에 빠지자 그 탈출수단으로 북한문제를 꺼내들고 북한문제에서 업적을 세우려 하고 있다는 우려들이 나오고 있다. 필자는 이명박의 위험한 장난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 1. 김정일은 우리의 적이다. 군 최고통수권자는 적의 입장과 적의 성향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위 발언들을 보면 그는 적을 모르고 있다. 첫째, 김정일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다. 핵은 정권유지를 위한 유일한 수단이자 통일의 수단이다. 김정일은 핵무기와 핵 운반수단인 대륙간 탄도탄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를 가지고 오키나와와 괌에 있는 미군을 공격하면 유사시
제주시청 앞 광장에는 5억 8천만 원짜리 붉은 조형물이 “4.3 저항정신 표현”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찰을 달고 우뚝 서있다. 제주시청의 공식 자료에 의하면 이 조형물은 2004년 2월 23일에 계획이 확정되어 2006년 6월 20일에 설치완료 되었다고 한다. 2006년 6월 16일, 제주도재향경우회 등 제주도 8개 보수단체가 제주시를 상대로 이 조형물을 8월말까지 철거해 달라는 최후통첩의 문서를 제출하였고, 이 문서에는 어째서 “4.3저항정신 표현”이라는 이름을 단 조형물이 설치될 수 없는 것인지 조모조목 표현돼 있다. 제주시 상징조형물이 사회에는 제주 4,3사태를 놓고 해석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애국 편에 선 사람들은 4.3을 ‘반란’이라 하고, 빨갱이들은 ‘저항’이라 한다. 소련군정은 한반도를 동유럽에서처럼 극동의 위성국가로 만들려고 해방 9일 만인 8월 24일에 평양에 진주했고, 미군정은 이보다 15일 후인 9월 8일에야 서울에 진주했다. 소련은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여 1946년 2월에 북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토지개혁과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사실상의 북조선 정부가 들어 선 것이다.해방 직후부터 남한을 사실상 장악한 남로당, 제주도 빨갱이들은 이 남
‘신정아’ 신드롬이 탄생했다. 참여정부의 청와대가 배출한 산물이다. 신정아는 학력을 위조하고, 대통령실장으로 불리는 똥아저씨(변씨)와 결탁하여 온갖 종류의 파행을 저지르면서 사회질서를 교란했다. 그가 감옥에 갔다고 해서 그가 끼친 사회적 빚을 다 갚은 것은 아닐 것이다.이런 ‘사회적 죄인’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적반하장으로 사회를 공격하고 나섰다. ‘사회가 나를 몹쓸 사람으로 매도하고 매장하려 했지만 그 잘난 사회 잘난 거 없다’는 식의 반격을 한 것이다. ‘그 잘났다는 대통령 노무현도 내게서 묘한 매력이 풍긴다며 출세하기를 권했고, 박사학위를 가졌다는 대통령실장 변양균은 내가 애정의 표현으로 정강이를 차도 좋아했고, 똥아저씨라 불러도 좋아했고, 권력을 동원해 내게 온갖 혜택을 주면서 늘 사랑을 고백했다. 근엄하다는 서울대 총장은 주로 밤 10시 이후에 나를 불러내 어설픈 시그널들을 보내며 치근덕거렸고, 일등신문의 모 기자는 끈질기고 노골적인 성추행을 퍼부었고. . . 이 사회에서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 겉으로는 잘난 체 근엄한 체 해도 학위 없는 내게 추한 짓들 했다’신정아가 방어자에서 공격자로 돌변한 것이다. 신정아로부터 공격을 당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름조차 낯선 스쿠크법(이슬람 채권법)이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아도 어디에 시원한 대답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가, 한동안 추리를 해보았다.이슬람채권법은 일반 자유세계의 채권법과 차이가 있다. 일반채권에는 이자가 따르지만 이슬람 율법은 돈 장사를 금지하고 있어 이자를 받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율법을 피해가기 위해 고안된 것이 이른바 ‘스쿠크’라 불리는 이슬람채권인 모양이다. 얼마 전 우리는 UAE에 원전 수출 계약을 따냈다. UAE에 가서 원전을 건설하는 여러 회사들이 막대하게 소요되는 건설자금을 구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원전 수출을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규모의 파이낸싱이 뒷받침 돼야 하는데 우리 원전수출업체들에는 아직 그게 부족한 모양이다.더구나 원전수주경쟁에서 우리와 경쟁을 치렀던 미국이나 일본으로부터 달러를 빌리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모양이다. 이렇게 답답할 때의 해법은 무엇인가? 오일머니다. 이자 수수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을 위반하지 않는 방법을 고안하여 오일머니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방법이 우리정부가 고안한 스쿠크법이며 그 생김새는 아래와 같다. 원전수출업체 중의 한 업체를 A업체라 하자. A업체
아래 타이어 사진은 필자의 아파트 주차장 경비실 근방에 세워둔 필자 소유 차량의 좌측 뒷바퀴를 찍은 사진이다. 누군가가 예리한 조각칼 정도로 오려낸 흔적이다. 바람이 새지 않을 정도로 오려낸 것을 모르고 필자는 지난 2월 17일 새벽 6시에 병원을 향해 출발하여 운행하던 중 모 고가도로에서 갑자기 타이어가 납작해지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3차선 고가도로를 풍뎅이처럼 지그재그로 요동치다가 두 바퀴를 돈 다음 가드레일을 박고 정지한 것이다. 추락하지 않은 것이 신통했고, 다른 차들이 와서 충돌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요행이었다.이런 사고를 당하고 나니, 작년에서 지금까지 4차례에 걸쳐 차에 못이 박혔던 사실이 떠올랐다. 차량운행을 거의 하지 않고, 세워두는 날이 대부분인 차량, 험한 곳을 다니지 않는 차량에 못이 이렇게 여러 번 박힌 것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해놓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년연휴에 먼 길을 떠난다. 그러나 필자는 구제역으로 인해 강원도에 가지 않고 차량을 일주일 정도 세워놓았다. 그리고 어느 날 보니 타이어가 주저앉아 있었다. 한번은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 대구에까지 못이 박힌 타이어로 운행하기도 했었다.필자는 범인이 필자
2월 24일, 연합뉴스는 가히 충격적이다. 50대의 김시 성을 가진 사람이 설득력 있는 증거자료와 증인까지 신청하여 자기가 김영삼의 아들이라며 친자확인 소송을 냈는데 김영삼이 법원의 유전자 검사 명령에 일체 응하지도 않고 소송 대리인조차 선임하지 않고 무대응으로 일관하여 결국 법원은 김씨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한다. 김영삼이 혼외 아들을 만들었다는 법원 판결이 나온 것이다. 혼외 아들이 있다면 그 자식을 자식으로 인정하고, 응분의 사랑을 베풀고,그늘에서 살게 한 데 대해 눈물을 흘리며, 최소한의책임을 지고 용서를 구하고 얼마간의 봉사를 하는것이기본적인도리일 것이다. 못 배운 젊은 인간들이 베트남이나 필리핀에 가서 아이들을 뿌려놓고 나 몰라라 하는 양아지 족속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이런 장돌뱅이보다 더 못하고 개보다 더 못한인간이 어쩌다 대통령이 되었다.이런 더러운 장돌뱅이 밑에서 12.12와 5.18역사를 뒤집은 판사, 검사, 정치인들의 얼굴을 다시금 훑어보고 싶다. 재판부는 김씨가 김 전 대통령의 친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제기한 증거의 일부가 인정되고 김 전 대통령이 유전자 검사 명령에 응하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해 판결했다. 김씨는 각종 서류 등을 증거로 제시
김문수, 김진홍, 이재오 등 등 과거의 좌익행위자들이 전향했다며 그들의 리더십 킹덤을 구축해가면서 정권장악을 노려왔다. 미국을 적대시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드러내놓고 원수라 욕하고 모함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미국을 좋다 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훌륭하다 말한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 완전 전향했군”하고 믿어준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폭동에 충격을 받았다. “국민이 나를 원하지 않으니 즉시 하야하겠다” 이런 성명을 발표한 즉시 그는 걸어서 이화동으로 향했다. 차를 대기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대통령이 아니다. 더 이상 국민의 세금을 쓸 자격이 없다” 그리고 걸어서 갔다.그는 대한민국에 일생을 헌신했지만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지갑도 없이 황야의 무법자에 나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으로 떠났다. 빨갱이들로부터 온갖 욕을 다 듣는 대통령이지만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과 공직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어떤 모습으로 떠나야 하는지에 대한 모델을 남겼다.그 후 박정희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 역시 참으로 깨끗한 지도자였다. 거지의 나라를 부유한 나라로 등극시켰고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약간의 흠을 남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식들이 없어 남겨준 재산이 없었지만 박대통령은 자식들이 있기에 오늘의 자식들이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박근혜에게는 박근혜로서는 단독으로 축적할 수 없는 많은 재산이 있다.그 다음 전두환 대통령이 나왔다. 그는 안목이 있고 독서를 많이 한 장군이었고 박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어린 장군이었다. 그는
5.18은 전라남도 광주시민들과 국가 사이에 발생했던 10일간의 무력충돌사건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09:30분경,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계엄령에 따라 경계근무를 하고 있던 20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 250여명의 학생들이 가방에서 돌멩이를 꺼내 일제 공격한 순간에서 시작됐고, 5월 27일 새벽 05: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되었습니다. 당시의 국민들에 5.18광주사태는 적색분자들이 배후 조종한 반국가 폭동으로 인식됐고, 당시의 법관들도 그렇게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이 사회는 북한의 대남공작부가 양성해온 386학생 세력을 중심으로 민주화라는 광란의 붉은 쓰나미를 맞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고, 여기에 1995년 10월 19일, 노태우 비자금이 터져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가세하면서 군사정권에 대한 비난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노태우 비자금이 터지자 당혹스러운 입장에 선 사람은 김영삼이었습니다. 노태우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김영삼이 노태우의 비자금을 수천억 원 규모로 물려받았을 것이라는 의혹을 산 것입니다. 이에 감이 뛰어나다는 김영삼은 그 동안 아무 문제가 없다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에
안기부자료인 증8의 55-65쪽에는 17개 시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사실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5.18관련사건수사결과’보고서(증9)에도 1980년 5월 21일, 12시부터 16시까지 4시간대에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 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증9, 100, 101쪽) 아래에서 증명하겠지만 북한 책을 보면 우리 측 자료 38개에 더해 북한 역사책이 더 추가해준 6개의 무기고 이름이 추가돼 있습니다. 남북한 자료를 합치면 44개 무기고가 되는 것입니다.같은 검찰보고서에는 20사단 지휘부가 광주 톨게이트를 5월 21일 오전 8시 경에 통과할 것이라는 극비사항을 입수한 300명의 시위대가 광주 톨게이트 부근에서 화염병 등을 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그 지역을 통과하던 20사단 지휘부를 공격한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들 300명은 사단장용 지휘차를 포함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한 후 곧바로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향했고 도착시간이 오전 9시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이와는 별도로 또 다른 300명이 5대의 대형 버스에 타고
5.18측은 5월 21일 오후 1시의 도청 앞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고, 이것이 첫 발포였으며, 이는 전두환의 발포명령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중동을 앞세운 언론들은 이들의 나팔수가 되었다. 하지만 발포는 5월 19일 오후부터 궁지에 몰린 계엄군이 살아남기 위해 시작됐으며 5월 21일의 도청 앞 발포는 9번째 발포였다.첫 번째 발포는 시민들이 고립된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불타는 짚단을 넣을 때 소위가 살아남기 위해 쏜 공포사격이었다. 어찌 전라도 사람들이 차마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 위해 불타는 짚단을 넣을 수 있다는 말인가? 불덩어리를 집어넣는 행위와 이를 모면하기 위해 공포를 쏜 행위를 놓고 비교해 보자. 누가 먼저 공격했으며, 어느 행위가 더 야만적인 살인행위인가? 이런 야만이 있는 전라도 사람들에게 총이 있었다면 아마도 공수부대 장병들처럼 자제력을 발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광주 시위대는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장갑차를 연속해서 돌진시켰고, 대형차량들을 지그재그로 돌진시켰다. 참으로 무서운 살인행위였다. 이에 대해 대대장들이 바퀴에 대고 총을 쏘았다. 여론의 승기를 잡은 5.18사람들은 이런 살인적인 차량 돌진행위들은 거론
이 구더기 같은 빨갱이들아 ~~ 애국 영화 포화 속으로영화 “포화속으로”를 보았다. 참으로 가슴을 울리는 영화였다. 2009년 2월 15일, 이명박은‘워낭소리’를 관람하고 극찬을 하면서 독립영화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보다 2년 전인 2007년 8월 4일, 박근혜는 광주에 가서 “화려한 휴가”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했다. “광주의 눈물과 아픔을 마음속에 깊이 새길 것이며 앞으로 진정한 민주주의 선진국이 돼서 이러한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 된다고 생각한다”필자는 어제(6.26) “포화속으로”를 보았다. 이 영화에 비하면 ‘워낭소리’와 ‘화려한 휴가’는 빨간 쓰레기들이었다.‘포화속으로’는 71명의 학도 의용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어떻게 그 어린 것들만이 교복과 교모를 쓴 채, 오장범이라는 학생을 중대장으로 하여 포항여중 건물에 달랑 남게 되었는지, 그리고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 건물에서 북괴군과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원 몰살되었는지, 이 모든 과정을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장엄한 분위기로 엮어 나갔다, 이는 실화를 극화한 영화이며, 이들의 용맹스러운 전투로 인해 북괴가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는 시간을 무려 11시간 동안이나 지연시켜 낙동강
1980년 5월 21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4시간 동안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 위장돼 있는 38개 무기고가 털렸다. 38개 팀이 각 무기고로 가는 약도 한 장씩을 가지고 동시에 출발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반 국민은 무기고 옆을 지나면서도 그게 무기고인지를 알지 못한다. 무기고 위치는 비밀로 관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38개라는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얼마나 오랜 동안에 걸쳐 찾아낼 수 있을까? 숫자로는 제시할 수 없겠지만 상당한 재능이 있는 여러 사람들이 동원되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헤매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사람들에게 ‘무기고 어디 있는지 아느냐?’ 하고 물어보며 다닐 수도 없는 성격의 일을 성사시키려면 상당한 재간과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 하나의 무기고 위치를 알아내려면 여러 날에 걸쳐 예리한 코를 가지고 냄새를 맡은 후, 그 곳을 여러 날에 걸쳐 관찰해야 겨우 하나의 무기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광주 시민들이 5월 18일 이후 불과 3일 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니다. 더구나 황석영과 북한당국이 쓴 5.18 역사책들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