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측은 5월 21일 오후 1시의 도청 앞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고, 이것이 첫 발포였으며, 이는 전두환의 발포명령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중동을 앞세운 언론들은 이들의 나팔수가 되었다. 하지만 발포는 5월 19일 오후부터 궁지에 몰린 계엄군이 살아남기 위해 시작됐으며 5월 21일의 도청 앞 발포는 9번째 발포였다.
첫 번째 발포는 시민들이 고립된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불타는 짚단을 넣을 때 소위가 살아남기 위해 쏜 공포사격이었다. 어찌 전라도 사람들이 차마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 위해 불타는 짚단을 넣을 수 있다는 말인가? 불덩어리를 집어넣는 행위와 이를 모면하기 위해 공포를 쏜 행위를 놓고 비교해 보자. 누가 먼저 공격했으며, 어느 행위가 더 야만적인 살인행위인가? 이런 야만이 있는 전라도 사람들에게 총이 있었다면 아마도 공수부대 장병들처럼 자제력을 발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주 시위대는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장갑차를 연속해서 돌진시켰고, 대형차량들을 지그재그로 돌진시켰다. 참으로 무서운 살인행위였다. 이에 대해 대대장들이 바퀴에 대고 총을 쏘았다. 여론의 승기를 잡은 5.18사람들은 이런 살인적인 차량 돌진행위들은 거론하지 않았고, 도둑고양이 같은 언론들도 기자정신을 상실한 채 이들에 영합했다. 그리고 민주화집단들의 목소리만 대변하면서 대대장들이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바퀴에 대고 총을 쏜 것만 문제 삼아 “발포”라는 두 개의 글자로 형상화하여 계엄군을 매도해 왔다.
5.18사람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도청 앞”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영화 화려한 휴가는 도청 앞에서 수천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묘사했다. 5.18의 꽃이 바로 도청 앞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5.18사람들은 이제까지 도청 앞에서 대량 학살이 있었고, 그 학살 명령은 전두환이 내렸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5.18관련사건수사결과’를 보면 도청 앞 사건이 참으로 싱겁게 정리돼 있다.
첫째 도청 앞에서는 대량학살이 없었다. 5월 21일에 발생한 사망자 61명중 28명이 도청과는 거리가 먼 곳들에서 사망했고, 도청 앞에서 사망한 33명 중 20명은 자상 등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으며, 13명만이 총상에 의해 사망했다. 이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총기불상은 무기고에서 나온 여러 종류의 무기들인 것이다. 도청 앞에서 사망한 13명 모두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기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당사자들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이는 수사기록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 도청 앞에서 20명이 자상 등으로 사망했다는 수사기록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청 앞에서는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일체 신체적 접촉이 없었으며, 따라서 자상은 발생할 수 없었다. 광주사태 상황들 중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해 있었던 도청 앞에서 계엄군 아닌 다른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광주시민들을 신체 접촉을 통해 살해했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문제의 5월 21일에는 계엄군이 저지르지 않은 사망자들을 모두 계엄군이 저지른 소행인 것으로 뒤집어쓴 것이다.
도청 앞 상황을 경험한 당시의 공수부대 대대장들은 끝까지 조준사격은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검찰 보고서에 나타난 자료들을 보거나 미 헤리티지 보고서를 보면 이들 대대장들의 증언에 신뢰가 간다. 5.18의 황산벌은 도청 앞 광장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44%에 해당하는 28명씩이나 다른 곳들에서 사망했을까? 그날 그 시각에 다른 곳들에서는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접촉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2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진실이 이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수많은 5.18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고, 수많은 매체들을 동원해 가면서 도청 앞 발포명령자가 전두환임이 틀림없지만 단지 수사기록이 공개되지 않아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요란을 떨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수사기록을 보니 거기에는 도청 앞 사망자들 역시 ‘자작극의 산물’이었음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코미디인가?◇
지만원, http://systemclu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