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라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의피전연피 사량위성상 다음, 두 번째로 능변(能變)하는 이 식(識)을 말나식(末那識)이라 한다. [말나식은] 그것[제8식]을 의지하여 움직이고, 그것[8식]을 반연하여 사량(思量)하는 것으로 성상(性相)을 삼는다.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나 아뢰야식이 제1 능변(能變)식이고, 그 다음으로 능히 변화를 일으키는 식(識)은 말나식(末那識)이라고 부른다. 말나(末那)는 인도말의 음역이고, 의(意)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육식(六識)인 의식(意識)과 혼돈을 피하기 위해 주로 말나식이라 부른다. 의(意)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지(意志)를 그 본성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제6송에서 의지적(意志的) 본성을 설명하고 있다.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 의피전연피 사량위성상 의피전(依彼轉)의 피(彼)와 연피(緣彼)의 피(彼)는 제8 아뢰야식의 대명사이고, 주어 제7 말나식은 생략되어 있다. 말을 붙여보면, 제7 말나식은 제8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움직이고 아뢰야식에 의지[반연]하여 사량(思量)하는 것을 성(性)과 상(相)으로 한다. 제8 아뢰야식에는 수많은 겁 동안 쌓여져온 생멸하는 수많은
유식 30송의 개요(槪要) 유식 30송 중 제1송에서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25송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혔으며, 26송에서 30송까지는 유식의 수행과정을 밝혔다. 제1송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我)와 법(法)은 사실(事實)을 바로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데, 그 변화는 식(識)을 의지해 일어나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에는 3가지 식(識)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우리들이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이 사실대로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이 아니고 각자의 식(識)에 의해 감지(感知)되는 느낌이다. 이러한 식(識)은 3가지뿐이라고 했다. 제1송에서 우리들의 마음에 3가지 식이 있음을 밝혔다. 제2송에서 이 3가지 식(識)은 이숙식(異熟識), 사량식(思量識) 그리고 요별경식(了別境識)이다. 이숙식은 종자와 결과가 다르다고 하여 이숙식이라고 하는데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기도 하고,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짓는 일체의 업이 종자로 아뢰야식에 저장된다는 의미로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제3송에서, 아뢰야식이 어떻게 일체 업의 종자를 받아서 지니는지, 어디에 저장하는지, 연(緣)을 만나면 어떻게 그 종자들을 요별해서 그
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차즉무루계 부사의선상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안락해탈신 대모니명법 이것이 곧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경계이며 부사의(不思議)한 선(善)이며, 상(常)이고, 안락(安樂)한 해탈신(解脫身)이고, 대모니(大牟尼)이니, 이를 법신(法身)이라 한다. 차즉무루계(此卽無漏界)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 차즉무루계(此卽無漏界)의 차(此)는 29송의 사이조중고(捨二粗重故) 변증득전의(便證得轉依)를 받는 말이다. 사이조중고(捨二粗重故), 즉 번뇌장와 소지장을 여의였으므로 전의(轉依)를 증득해 미세한 번뇌마저 완전히 소멸하였으므로 이것을 곧 더 이상 번뇌가 없는 경계(境界)라고 하여 무루계(無漏界)라고 했다. 무루계(無漏界)의 상(相)은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하고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하며 대모니(大牟尼)인데 이름하여 법신(名法)이라 한다고 했다. <대모니명법(大牟尼名法)이란 모니(牟尼)는 적묵(寂默)의 뜻으로 언설동작(言說動作)과 심연분별(心緣分別)을 여읜 것을 말하고 법(法)이란 법신(法身) 또는 법성신(法性身)을 말한 것으로 이를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 또는 대모니신(大牟尼身)이라 한다>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은 선(善)의 부사의성과 상(常)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무득부사의 시출세간지 捨二粗重故 便證得轉依 사이조중고 변증득전의 얻을 것이 없는 곳에 부사의(不思議)한 일이 있으니, 이것이 곧 출세간지(出世間智)이다. 두 가지의 거칠고 무거운 것을 버렸기 때문에 곧 전의(轉依)를 증득했다. 제28송에서 離二取相故 智都無所得을 설명하면서, 자기 자신의 잘못된 성품[탐진치만의견(貪瞋癡慢疑見)]을 찾아 소멸하고, 자기가 보고 듣고 하는 바에 따른 잘못된 견해를 끊임없이 찾아 소멸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어느 듯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대상임을 알게 되었으니 너의 안녕이 나의 안녕이 되고 나의 불행이 너의 불행이 될 수 있는 이치를 알게 되었으니 너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하니 얼마나 네가 나를 알아주고 너에 의해 내가 득을 볼 수 있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얼마나 알아주고 너에게 득을 베풀 수 있느냐는 문제로 돌아서게 되니, 너로부터 득을 봄으로서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덕을 베풂으로서 우리의 행복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너와 나를 분별하여 경쟁 관계에 있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약시어소연 지도무소득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이시주유식 이이취상고 만약 소연경(所緣境)을 대할 때 조금도 소득심이 없는 지혜를 얻었다면, 이 때 유식성에 머물게 된다. 이것은 이취(二取)의 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소연(所緣)은 능소(能所)의 소(所)이니 어떤 상대를 대할 때 조금도 득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지혜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능취와 소취, 능과 소의 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니, 이 때 유식성에 머무는 것이 된다. 능소의 상을 여의었다는 의미는 제7 말나식의 아상(我相), 아소(我所), 아애(我愛), 아만(我慢)을 여의었다는 뜻이고, 이는 곧 탐진치 삼독을 여의었다는 말이니 자기를 위한 소득심이 모두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금강경 제5송에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하니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을 모두 여의고,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일체 소득심을 여의면 즉견여래(卽見如來) 곧 원성실성을 보리라. 이 송에서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여의고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성취할 것을 말씀하신다. 도무소득(都無所得)은 반야심경에서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에서 시작하여 “고집멸도도 없고 지혜도 없으며 얻을 것도
제 25 송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차제법승의 역즉시진여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상여기성고 즉유식실성 이것이 모든 법의 승의(勝義세간의 이치보다 수승한 깊고 오묘한 의리(義理))이고 또한 진여(眞如)이다. 그것의 본성은 항상 여여(如如) 하기 때문에 유식(唯識)이 곧 실성(實性)이다. 乃至 “이것이 모든 법의 승의(勝義 세간의 이치보다 수승한 깊고 오묘한 의리(義理)를 승의라 한다)이다.” 중 ‘이것이’가 제24송의 “후유원이전(後由遠離前) 소집아법성(所執我法性),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를 받는 말이니, 말을 붙이면,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이것이 제법승의(此諸法勝義)이고 또 역시 이것이 곧 진여이다가 된다. 앞의 구절에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라는 말씀은 오별경 수행을 통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성취하여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이미 여의었다는 말씀이니 전생에서부터 가지고온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던 성질이 180도로 변하여 완전히 위타(爲他)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제법승의(諸法勝義)란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초즉상무성 차무자연성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후유원리전 소집아법성 처음은 곧 상(相)이 무성(無性)이요, 다음은 자연성(自然性)이 무성(無性)이다. 그리고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대한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초즉상무성(初卽相無性) 처음, 상(相)이 무성(無性)이라고 한 것은 상(相)은 변계소집(遍計所執)하여 일어나는 모습인데, 이렇게 일어나는 모습이 무성(無性)이란 말이다. 이는 금강경 제5송에서 제상비상즉견여래(諸相非相卽見如來)에서 제상(諸相)이 변계소집된 상(相)이고 비상(非相)이 무성(無性)이다. 그리고 32송에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고 한 말씀이 변계소집의 상(相)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고 한 말씀도 상무성(相無性)과 같은 뜻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모두 변계소집성이 만연되어 왔기 때문에 누적된 문제이다. 이 변계소집은 개인의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고, 국제적, 국내적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이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가정의 불화와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심각하게 바라보고 이해해야할 성품이다. 위에서 이미 설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즉의차삼성 입피삼무성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고불밀의설 일체법무성 곧 이 3성(性)에 의해 저 3무성(三無性)이 정립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 일체법이 무성(無性)이라 설(說)하셨다. 즉의차삼성(卽依此三性)의 즉(卽)은 ‘곧’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라는 뜻이고, 의차삼성(依此三性)은 이 ‘삼성에 의해서’ 인데 삼성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즉의차삼성(卽依此三性) 입피삼무성(立彼三無性)은 곧 이 삼성에 의해서 저 삼무성(三無性)이 정립(定立)된다고 했다. 변계소십성은 제7식이 8식에 의지하여 일으키는 심상(心相)이 자기 혹은 자기 것이라고 집착하여 여러 가지 득실(得失)을 따지는 계산이기에 그 심상(心相)에는 자성(自性)이 없고, 또 오감관에 비춰진 사물을 제7식이 8식에 저장된 과거 경험에 의지해 만든 심상(心相)에 집착하여 희비고뇌(喜悲苦惱)의 감정을 일으키거나 손익(損益)을 따지는 계산이기에, 이 심상도 실재하지 않은 허상(虛相)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변계소집성에는 불변하는 고정된 성품이 없다. 그러므로 변계소집성은 무성(無性)이라 한다고 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