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사건이 발생한지 벌써 40년이 되었다 이 사건이 위기의 나라를 구한 충성스런 일이었는지? 반역을 한것인지? 를 놓고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불행한 사건이다. 그러나 40년 동안 국가 중요 대사의 진실이 가려지지 못하는 현실이 더욱 불행한 것일 수도 있다. 당시 수도 서울의 경비를 담당하는 수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으로 게엄사령관의 공관으로 현장에 출동도 했었고 긴박한 상황에서 수도사령부에서 큰 역할을 하였던 신윤희 예비역 소장(당시 중령)으로 부터 수방사 내에서 이루어진 그 당시의 상황과 12.12 사건이 발생하게된 배경에 대한 증언을 보도한다 본 내용을 통하여 국민들이 판단에 다소나마 기여하기를 바란다. 본 방송은 뉴스타운에서 제작하였으며 2편으로 나누어 방송하는 제 1편이다.
다시읽는 소신있는 주장(편집자 편집) "12,12사건’은 군사반란이 아니다" 소위 ‘10.26사건’이란 1979년 10.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청와대 옆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는 안가)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과 함께 만찬도중 가장 신임하고 믿었던 권력의 제 2인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시해 당한 사건이다. ◎ 10.26사건당일 정승화의 행적 1979년 10. 26일 저녁 19:00경 김재규 정보부장이 저녁 만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할 때(궁정동 안가)지척지간의(약50m)옆방에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획된 김재규의 저녁초청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으나, 대통령과의 만찬으로 참석이 늦어짐으로 대신 김재규의 부하 김정섭 차장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으라는 연락을 받고 총장은 김정섭 차장과 시국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정승화의 귀에 수십발의 총성이 들렸다. 정승화 총장은 바로 옆 건물쪽에서(대통령 만찬장) 수십발의 총성을 듣고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 안하고 무슨 총소리 인지 알아보라고 말한뒤, 그대로 저녁을 계속하고 있었다.(약300m떨어진 30단과 궁정동 파출소에서 총소리를
12.12특별법이라고 별도로 제정된 법률은 없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의 헌법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한 5.18과 12.12 관련자들을 처벌할 목적으로 2가지 특별법을 신속하게 제정하였다. 하나는 ‘5.18민주화 운동에 관한 특별법’이고, 또 하나는 12.12 관련자 처벌을 위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다. 12.12와 관련된 위의 특례법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제 1조는 목적으로서 이 법은 헌법의 존립을 해하거나, 헌정질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의 배제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서 헌법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제 2조는 용어의 정의로서 헌정질서 파괴 범죄라 함은 형법 제 2편 내란의 죄, 제 2장 외환의 죄와 군 형법 제 2편 제 1장 반란의 죄, 제 2장 이적의 죄를 말한다고 되어 있고, 제 3조는 위의 제 2조 에 해당하는 범죄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되어있다. 제 2조 헌정질서 파괴 범죄의 내용 중 군형법상의 반란죄와 이적 죄를 포함시킨 것은 12.12사건 관련자를 처벌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 조항을 필자는 ‘12.12특별법’ 이라
소위 ‘10.26사건’이란 1979년 10.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청와대 옆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는 안가)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과 함께 만찬도중 가장 신임하고 믿었던 권력의 제 2인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시해 당한 사건이다.◎ 10.26사건당일 정승화의 행적 1979년 10. 26일 저녁 19:00경 김재규 정보부장이 저녁 만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할 때(궁정동 안가)지척지간의(약50m)옆방에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획된 김재규의 저녁초청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으나, 대통령과의 만찬으로 참석이 늦어짐으로 대신 김재규의 부하 김정섭 차장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으라는 연락을 받고 총장은 김정섭 차장과 시국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이때 정승화의 귀에 수십발의 총성이 들렸다. 정승화 총장은 바로 옆 건물쪽에서(대통령 만찬장) 수십발의 총성을 듣고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 안하고 무슨 총소리 인지 알아보라고 말한뒤, 그대로 저녁을 계속하고 있었다.(약300m떨어진 30단과 궁정동 파출소에서 총소리를 듣고 각각 현장에 확인하러 왔다가 안가 정보부 요원이 이상 없으니 돌아가라고 한 사
소위 ‘10.26사건’이란 1979년 10.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청와대 옆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는 안가)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과 함께 만찬도중 가장 신임하고 믿었던 권력의 제 2인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시해 당한 사건이다.◎ 10.26사건당일 정승화의 행적 1979년 10. 26일 저녁 19:00경 김재규 정보부장이 저녁 만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할 때(궁정동 안가)지척지간의(약50m)옆방에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획된 김재규의 저녁초청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으나, 대통령과의 만찬으로 참석이 늦어짐으로 대신 김재규의 부하 김정섭 차장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으라는 연락을 받고 총장은 김정섭 차장과 시국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이때 정승화의 귀에 수십발의 총성이 들렸다. 정승화 총장은 바로 옆 건물쪽에서(대통령 만찬장) 수십발의 총성을 듣고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 안하고 무슨 총소리 인지 알아보라고 말한뒤, 그대로 저녁을 계속하고 있었다.(약300m떨어진 30단과 궁정동 파출소에서 총소리를 듣고 각각 현장에 확인하러 왔다가 안가 정보부 요원이 이상 없으니 돌아가라고 한 사
북한 김정일은 25년전 1983년 10월 9일 서남아 순방의 첫 방문지인 미얀마를 친선 방문중이던 대한민국의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한 각료들을 암살하기 위하여 아웅산 국립묘지 참배시 폭탄테러 만행을 저질렀다.이 천인공노할 테러사건은 대통령 일행이 미얀마의 성지인 아웅산 묘소를 참배시에 건물 천정에 미리 설치한 폭탄을 원격 조정하여 폭발시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던 서석준 경제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 17명의 아까운 인재가 현장에서 순직하고 이기백 국방장관을 비롯한 14명은 부상을 당했다.물론 전두환 대통령을 직접 노린 폭탄테러 이었으나 현장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각료가 전두환 대통령으로 오인하고 범인들이 미리 폭탄을 터뜨린 것이 다행스럽게도 전두환 대통령은 테러 현장의 화를 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원통하고 비통한 만행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의 비통한 심정과 더욱이 그 유가족들의 애석함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하여 매년 10월 9일이 되면 한 번도 거르시지 않고 당시의 장, 차관 및 참모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17명의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계신다.당시 정부는 북한에 대하여 강력한 항의와 사과를
28년전 12.12 사건을 기억 하십니까? (12.12사건은 쿠데타가 아니다) 28년전 1979년 12월12일 18:00시에 발생한 12.12 사건은 국가 원수가 저격 살해된 국가 변란 사건인 10,26사건에 관련된 혐의가 있는 정승화 총장을 10.26사건의 수사책임을 맏고 있던 합동수사본부가 조사하려는 과정에서 정승화의 연행조사를 저지하려는 친 정승화 군부의 저항으로 일어난 군부내의 갈등을 당시 군 통수계통에 있던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과 노재현 국방장관이 미온적으로 대처함으로서 사태가 무력충돌로까지 확대된 불행한 사건으로 또한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운 역사적인 대사건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대다수 국민들은 아직도 김영삼 정부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왜곡된 12.12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30여년이 흘러간 지금이야말로 12.12사건의 정확한 진실이 국민에게 재조명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2.12사건의 원인은 10.26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해주범인 김재규 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정승화 총장을 조사하기 위하여 연행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10.26사건 당일.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