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은 IMF 위기에 직면한 해였고 김대중씨가 입후보한 15대 대통령 선거의 해였습니다. 이해 5월 26일, 북한은 6.25 남침 도발 직전까지의 대남공작 실체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특집보도를 노동신문에 게재 했었습니다.“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라는 제목아래 (1)‘신념과 절개를 목숨 바쳐 지킨 성시백동지의 결사적인 투쟁을 보고’, (2)‘인생의 뜻 깊은 새 출발’, (3)‘나는 김일성장군님의 특사다’ (4)‘혁명가의 신념과 영생의 삶’이라는 주제로 김일성의 비밀공작원으로 활약하다가 6.25 남침전쟁 발발 이틀 후 간첩죄로 처형되었던 성시백( “인민 공화국 영웅 1호”의 칭호를 받음)의 공작활동을 대서특필 했던 것입니다.4.3 사건 발발 1년 전인 1947년 초, 평양에 올라가 김일성으로부터 회중 금시계를 선물 받는 장면으로부터 서울 복귀 후 각 정당과 산하단체를 묶는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선전공작’을 위해 ‘조선중앙일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종의 신문사를 경영하고 육군의 ‘사단’은 물론 예하의 ‘대대’와 ‘헌병대’, ‘사관학교’, ‘육군정보국’까지 ‘조직선’을 늘리며 국군의 와해공작과 정보공작을 펼치며 당시 서울에서 활
국방대학원 원장으로 34년 군 생활을 마친 후 2000년 8월부터 3년여 동안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4.3위원회)의 국방부 위촉위원으로 활동했던 仁江 한광덕입니다. 4.3위원회에는 국방부(2명)와 경찰(1명)로부터 모두 3명이 위촉되어 있었으나 박원순 기획단장의 일방적 독주를 막을 길이 없었고 고건 총리(4.3 위원회 위원장)의 주재 하에 왜곡된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던 2003년 10월 15일, 항의의 뜻으로 3명 전원이 동반사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음을 다시 밝히면서 다음 사실 하나 만은 온 나라에 확실히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4.3위원 사퇴 4년 후인 2007년 8월말, 저는 10년이 지난 1997년 5월 26일자의 북한 노동신문 특집보도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전문가에게 북한의 4.3사건 개입을 증명하는 자료를 구해달라는 주문을 해 놓고 있었는데, 그는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통일혁명을 위해 용감히 싸운 렬사”라는 특집보도 복사판을 주면서 용감히 싸운 이 통일혁명 열사가 직접 운영했다는 조선중앙일보와 신한일보 등을 찾아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관련부분 설명은 생략)이 보도문의 진위를 확인코자 저는 평소 지면이 있던 K대학
6.25’를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4.3’은 더욱 멀지만 서울시장에 출마한 박원순씨는 알아야만 하겠기에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는 60년 전의 순박했던 제주주민들도 알 수 없었고 오늘 날의 많은 국민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음으로서 4.3사건이 진압되지 않고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탄생될 수 없었다는 믿음 때문이다. 먼저 밝혀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4.3사건에서 영문도 모르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희생자들의 명예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고 보상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의 계엄령 하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사를 하거나 부상을 당해야 했던 군과 경찰의 명예도 매우 소중한 것이기에 4.3사건에 관한 대통령(노무현)의 정부차원 사과는 아무리 살펴도 결코 부적절했기에 보고서 작성 기획단장으로서 사과의 기초를 제공했던 서울시장 희망자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관하여 다음 몇 가지를 확인하며 그 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1. “북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라”는 스탈린 비밀지령(45.9.20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도 모르는가? 이 지령에 따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설치(45.10.19일)되며 그 이후
광복이 없었으면 건국도 없었고 건국이 없었으면 광복의 의미도 없었기에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일을 8.15 광복절로 정한 것은 선배들의 지혜였어라!1945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건국은 한반도 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이며 혼돈과 전쟁과 가난의 굴레 속에서 근대화와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케 한 성공과 발전과 기적의 보고(寶庫)였기에 건국 60주년을 맞는 오늘 만큼은 대한의 아들과 딸 들이 중국에서 보내오는 올림픽 승전보보다 더 큰 박수로 온 국민들이, 여-야, 노-사의 구분 없이, 한 목소리로 박수를 쳐야 할 텐데도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있을 수 없는 해괴한 모습이 나나타고 있습니다.대한민국의 건국 기념식참석을 거부한 일부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보이고 아직도 편싸움으로 그들의 기본임무인 국회등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안타까운 모습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파괴해온 인민공화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집요하고 기묘한 대남공작이 오늘 이 시간에도 지속되기 때문이며 공작임을 알고도 아니면 몰라서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徹底)한 경계(警戒)로 만반(萬般)의 대비(對備)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10년 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 전문필자는 11월22일자 지면에 이라는 제하의 노동신문 특집보도 글을 띄운 후 독자들로부터 많은 문의를 받으며 깊은 상념에 빠져야 했다. 문제의 노동신문 특집 보도(97.5.26) 이후에 황장엽 선생의 망명(1998.4.30)도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 내용이 클로즈업 되지 않은 채 10년이 흘렀을까? 통일부의 북한 자료센타 이외에는 노동신문의 열람이 불가능한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과거사를 논해온 정부의 각종 과거사 위원회의 위원들도 이 특집보도의 기사를 접하고, 북한이 대내외적으로 공식인정한 대남공작의 범위와 실체를 감지할 수 만 있었다면 그들의 과거사 평가활동에도 보다 큰 균형감이 작용될 수 있지 않았을까? 여야의 국회의원들이 그 기사를 읽어보기만 했더라도 국가보안법의 개정 혹은 존폐에 관해 그토록 무분별한 발언들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의 군과 공무원 그리고 애국시민들에게 10년 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가 시급히 알려지는 것이 국가의 안보와 직결된다는 판단에서 서둘러 이란 글을 써서 인터넷에 띄웠던 것이다. 애국시민들의 관심이 북의 대남공작에 집중되기만 하면 문제의 보도 내용이 국방일보와 기타의 주요 일간지에 소개될 것으
* 건국 60주년을 앞두고 제주4.3위원회에서는 금년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 4.3사료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이에 前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였던 한광덕(예.육군소장)씨가 4.3사료관 개관이 그대로 개관될 경우 당시 작전에 투입되었던 군.경의 명예가 실추되고 민간인을 학살한 집단으로 왜곡되는 심각한 문제가 있으므로 이명박 정부에게 시정, 보완을 촉구하고 나섰다. 아래 내용은 한광덕 장군의 제주4.3사료관개관에 따른 문제제기 전문이다. 대한 인민무장대의 습격과 우익인사 테러로 시작된 ‘4.3사건’의 초기국면은 미 군정하의 해방공간에서 발생했던 것이기에, 오늘에 와서 심판의 기준이 명확하지 못하다할지라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이 발령한 계엄령(48.11.17)하에서도 계속된 폭동은 대한민국의 헌법에 따른 국법질서의 유지차원에서 접근해야한다는 것이 군과 경찰을 대변하는 4.3위원 전원의 공통적 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거부하고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기도는 간과한 채 일부의 실수와 과오가 있었던 진압과정에서의 민간인 피해에만 초점을 맞추어 정부차원의 공식사과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