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의 시각에서 본 左右[남북]대결과 保革논쟁
한 승 조 / 前 고려대 명예교수
불교는 좌우대립이나 보혁논쟁과 마주치면 난감해지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불교는 그 교리상 어느 한 쪽에 편들기도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원래 中道(중도)에 처하고 싶어하는 종교사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中道(중도)는 본래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於中間(어중간)도 아니다. 당연히 左일 수고 있고 또 때로는 右 일수도 있으며 걸림없는 행동을 하고 싶어하는데 주위 사람들과 틀어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 그 어느 쪽도 아닌 中間派(중간파)로 자처 하다가 쌍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피해를 입기도 한다. 불교는 右派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좌파에 편들다가 봉변을 당하고 또 좌파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면 우파측에 미련을 보이며 두둔하다가 크게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그것은 불교는 흔히 약자를 동정하며 패배자들 편에 서려는 버릇 때문에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취급을 받는다. 사람들이 약삭빠르지 못하니까 항상 이기는 측에 들지 못하여 지는 측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본다. 그래도 불교도가 진리와 정의 그리고 慈悲(자비)라고 하는 원리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한 크게 잘못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의 교리에서 볼 때 좌우익의 출현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전혀 나쁘게 보려고 들지 않는다. 좌가 있기 때문에 우가 생기는 것이고 우익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좌파가 나타난 것이다. 좌우파가 대립하는 경우라도 쌍방이 자기 입장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의사소통과 자기들의 입장만 무조건 고집하지 않는 유연한 자세를 유지한다면 좌우의 대립관계는 아무 때고 상호 협력의 관계로 전환할 수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인류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과정이라고 보려고 든다. 보혁논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보수사상이나 혁신사상도 그 자체가 좋다 나쁘다 말하기가 어렵다. 쌍방이 그 나름의 存在理由(존재이유)와 장단점을 가짐으로써 각기 파의 주장만 옳다고 말하며 상대방을 제거대상 정도로 생각하여 배척하지만 않는 다면 保革論爭(보혁논쟁)이 골치 아픈 문젯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흥미진진한 토론이나 논쟁거리로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공산주의 세력이 벌이는 좌우대립이나 그들이 개입하는 보혁논쟁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그들 철학이나 사상 안에 사상의 여유나 융통성 유연성을 결여하는 것이 문제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내세우는 현대공산주의는 자신들의 주장이나 사상에 대하여 엄청난 집착력을 보인다. 그래서 貪瞋痴(탐진치)의 정신으로 유발된 좌우대립은 극한대립으로 발전하며 保革논쟁도 끝내 폭력투쟁이나 힘의 지배로 귀결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나 협상은 暴力革命(폭력혁명)투쟁의 또 하나의 변형일 뿐이다. 탐진치에 밑받침된 그들과의 대화나 타협은 전혀 무의미하며 결국 기만이며 사기극이었음이 드러나고 마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북한의 대화나 협상이 어디까지나 기만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그런 사실에 대한 무지와 환상이 공산세력에게 힘을 보태주면서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문제해결이 무작정 지연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말은 남북대화나 美北對話에도 적용된다. 미국과 북한의 김정일 정권간의 대화나 북한의 핵무장과 핵폐기 문제와 관련된 협상을 벌인다고 해도 의미 있는 결실을 맺지 못할 것으로 展望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문제는 한국의 識者層(식자층)에는 이런 생각을 보수꼴통들의 편견이라고 배격하면서 북한과의 대화를 과신하는 친북인사나 그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므로 한국의 安保危機(안보위기)는 무한정 연장되어 해결의 전망이 묘연할 수밖에 없다. 다음은 좌파적 사고방법의 특성과 그의 필연적인 행동성향을 말하며 그런 속성으로 인하여 생기는 행위상 결과에 대하여 언급하겠다. 첫째 특성은 좌파인사들의 左腦的인 사고성향이다. 좌뇌적인 사고성향은 현실적이며 합리적이며 분석적 계산적이다. 그에 비하면 右腦的인 사고성향은 비현실적이며 정서적 종합적이며 비계산적 직관적이다. 좌파들이 의도적 능동적 人爲的(인위적) 계획적 적극적인데 비하면 우파들은 비의도적 비인위적 그리고 비능동적 자연발생적 소극적인 성향을 보여서 존경을 받지 못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질 못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판단한다면 좌파들이 훨씬 더 똑똑하며 의욕적이며 더 많은 능력을 소유하는 것처럼 보이며 의욕적이며 부지런하여 훨씬 더 유능하다는 인정을 받는다. 반면에 우파인사들은 의욕이나 능력 면에서 뒤지며 무계획 무책임 무계획적인 듯이 보인다. 좌파가 매우 자주적이며 저항적이며 의욕적인데 비하여 우파성향은 外勢依存(외세의존)적이며 사대주의 또는 외부권위 의존적이며 무기력한 운명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니 젊은 세대의 추종을 얻지 못한다. 좌파는 개인적으로 똑똑하고 근면하여 유능은 하지만 크게 薄福(박복)한 편이다. 그러나 우파성향은 평소에 게을러서 별로 똑똑하지 못하여 존경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주변 또는 주변 强大國들의 지원이나 도움으로 비교적 편안하고 裕福(유복)한 형편을 누리는 듯이 보여서 年富力强(연부역강)한 젊은이들을 좌파 쪽에 빼앗기는 경향을 보여준다. 남측의 대한민국과 북측의 조선인민공화국을 비교해 보자. 대한민국 사람들은 북측 인민들보다도 훨씬 일을 덜하고 게으르고 무자각적으로 지내온 듯이 보이나 훨씬 더 자유스러운 가운데 유복하게 잘 산다. 실제로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또 발전시키는데 외세의 도움을 크게 받아왔음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에 비하면 북한 사람들은 나라를 만들고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외부의 도움이 훨씬 적게 받게 되니 아무리 주민들을 노력동원하여 천리마운동을 펼친다고 해도 나라는 너무 가난하며 오로지 억압적이며 긴장된 분위기 속에 허덕이며 살아 온 것이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보다도 훨씬 자유롭고 부유하며 더 우아한 문명사회에 살 수 있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두 국가의 理念과 體制의 차이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북한 공산정권하에서 사는 주민들은 남한체제하에 사는 동포들에 비하여 훨씬 더 진하고 많은 罪業(죄업)을 지으며 살아 온 것이니 세월이 지날수록 그런 죄업에 대한 業報(업보)에 짓눌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남북한이 그동안 無明과 錯覺(착각) 그리고 煩惱(번뇌) 妄想(망상) 속에서 살아왔지만 북한 사회의 업장이 훨씬 더 진하고 두터운 것이 사실이다. 흔히들 말하는 번뇌 망상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 탐・진・치, 교만 의심 그리고 惡見은 공산사회가 훨씬 더 심한 것이 사실 아닌가? 또 불교가 중생들의 정신질환으로 경계하는 作 止 任 滅(작지임멸)의 헛수고가 좌파세력이나 공산사회의 멸망을 재촉하는 것이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면 한국에서 벌어져 온 좌우대립이나 보혁논쟁은 더 이상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일 것 같다. 이러한 엄연한 사실 앞에 친북좌파들이 또 무슨 논리를 펴려고 드는 것일까? 또 일부 民衆佛敎의 추종자들이 무슨 말로 친북좌파노선을 정당화 합리화를 꾀하려는 것일까? 불교는 欲界(욕계) 色界(색계) 無色界(무색계)의 3界를 대비한다. 欲界(욕계)에서는 법보다도 힘이 더 유력하다. 有色界에서는 힘에 밑받침된 有爲法(유위법)이 더 작용한다. 無色界에서는 그러나 無爲法(무위법)이 지배한다. 북한은 외면적으로는 有爲法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힘=폭력이 말하는 사회이다. 남한에서는 有爲法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같으나 有爲法(유위법)은 無爲法(무위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남한의 有爲法(유위법)체계는 북한 측의 對南工作(대남공작)과 친북좌파의 교란작업으로 인하여 빛을 잃고 힘을 쓰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무력해져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이 아직 작동하고 있는지 국가보안법도 아직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태에 몰려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건전 보수세력이 아직도 힘을 잃지 않고 있으며 有爲法이 힘을 잃게 되었어도 佛法=眞理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서 소생의 기운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희망마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좌우대립과 남북경쟁, 保革싸움은 언제 그 결과가 드러날까? 그것은 아마도 물어 볼 필요도 없는 문제일 것도 같다. 남한의 건전 보수가 확실하게 佛法(불법), 곧 眞理 편에 설 때 북한은 이미 그 대결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 아닌가? 光明이 비추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있다. 大佛總(대불총)이 그런 역할을 自擔(자담)할 수는 없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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