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주간 행사참여 미국방문기 (1) - 민간외교사절단의 미국방문을 마치고 한 승 조 (대불총 상임고문, 고려대 명예교수) 이번에 나는 민간외교사절팀의 한 사람으로서 2009년 4월 26일부터 5월 3일까지 7박 8일동안 미국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은 미국 Suzanne Scholte의 Defense Forum 후원으로 추진된 North Korea freedom Coalition의 North Korea Freedom Week 행사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주간은 5월 2일의 시위로 끝나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는데 우리는 주로 4월 28일로 확정된 집회(Rally)에 참석하고 5월 2일에는 아침부터 귀국 길로 올라서 마지막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사)국제외교안보포럼 민간외교사절단은 김현욱 이사장을 비롯하여 1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26일 일요일 아침 8시 30분에 인천공항 3층 K카운터에 모이도록 되어 있었다. 일요일의 이른 아침은 교통혼잡이 없어서 공항버스는 생각보다 빨리 공항에 도착하였으므로 나는 일행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 모임 자리에 와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휴대폰 로밍을 하려 했으나 신용카드를 지참하지 않았던 이유로 못했다. 집을 나올 무렵부터 무엇인가 빠뜨리고 나온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제1일/4월 26일(일) 20여시간의 비행으로 도착한 미국 워싱턴의 덜레스공항 비행기는 11시 5분에 출발하였다. 나는 좌석에 앉으면서 손가방에 넣어온 <탄허>라는 소설을 읽으며 갔다. 오래 전에 사놓았던 책인데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읽을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동경에서 일단 내려서 한 시간 남짓 기다렸다가 UA804로 갈아타고 또 다시 15시간 남짓의 비행 끝에 우리는 미국 워싱턴 D.C.의 Dulles 공항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현지 시간으로는 오후 다섯 시 반쯤이었는데 내려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는데 시간이 예상보다도 많이 지체되었다. 그 이유는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수하물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약조사를 하는 개 때문에 그 짐이 우송과정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공항에서 나오자 나의 아들 가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지 못하여 다시 지체하고 있는 동안 나는 아들네 가족과 비교적 느긋한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내 아들이 나와 많이 닮아있다는 등 이야기를 했다. 그런가? 어찌했던 오늘이 일요일이라 아들가족이 나를 만나보기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의 현지 가이드가 나타나서 안내를 받으며 간 곳이 Springfield 하노버에 있는 International Calvary Church였다. 아담한 교외(敎外) 주택가에 있는 크지 않은 교회건물이었다. 여기서 수잔 솔티여사가 주최하는 ‘북한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일정이었다. 처음에는 그 교회건물 안에 우리들 외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지만 여섯시가 되면서부터는 교회신자들과 참가단체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저녁 여섯시부터 일곱 시까지는 북한의 인권부재로 인하여 희생된 북한인들을 위한 기도회였고 일곱 시부터 8시까지는 일요예배가 진행되었다. 우리 일행은 인천에서부터 거의 20시간 비행기로 오는 동안 별로 자지도 못하였으므로 매우 피곤하고 배도 고픈 참이라 두 시간 남짓의 교회행사가 좀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적당히 있다가 빠져 나가자고 우리끼리 합의한 상태였지만 막상 기도와 예배가 시작되자 그런 합의는 지켜질 수가 없었다. 북한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기도나 예배가 얼마나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진행되는지 우리는 모두 끝까지 앉아 있었다. 이처럼 크지 않은 교회, 많지 않은 교인들 모임에서 우리 일행 20명이 빠져나가면 달아오르던 열띤 분위기에 찬물 끼얹는 꼴이 되므로 모두는 예배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진지한 참여자의 자세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나는 불교인이라 교회의 분위기에 익숙한 편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특유의 과장된 목소리와 심한 몸짓 그리고 열정적인 외침의 기도가 북한의 인권과 자유화를 기원하는 장소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감동적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이처럼 훌륭한 재미한인과 기독교인들과 자리를 같이 한 것이 기분 좋은 놀라움(delightful surprise)이 느껴지면서 이런 행사가 한국의 불교인들 간에는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두 종교인들 간의 수준 차처럼 느껴져서 아쉬웠다. 북한의 인권과 자유를 기원하는 在美한인들의 기도모임 마이크로버스에 올라탄 우리 일행은 이러한 감동을 말하였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소감을 발표하였다. 나는 북한인권과 자유를 위한 오늘의 기도모임에 참석한 것을 매우 보람찬 기억으로 간직하겠다. 미국에 살면서 북한인들의 불행과 고난을 가슴 아파하는 기도회가 얼마나 훌륭하며 또 고마운 일인가! 어떤 이유에서이건 북한의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거나 탈북하다가 잡혀서 공개처형을 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겪어야했던 고난과 불행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그 벌을 받게 되어 있다. 오늘의 북한사람들의 불행과 재앙들에 대한 본인의 소견을 말하겠다. 불교의 인연법(因緣法)으로 본다면 오늘의 북한인의 고난이나 재앙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한다. 몇해 전인가 <요덕스토리>라는 가극을 보았는데 거기서 북한인들이 “하나님이시어! 하나님의 은혜를 남한사람들에게만 주지 마시고 우리 북한인들에게도 내려주시옵소서” 라고 외치며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오늘의 북한인들이 왜 그토록 참혹한 지옥과 같은 삶을 계속하고 있는가를 불교의 인연법으로 말한다면 부모나 형제들, 또는 이웃 인민들이 북한공산당의 학정과 독재 하에서 희생되며 죽임을 당하거나 숙청을 당하는 현장에서 남들의 아픔과 고난을 외면하거나 좌시하였던 죄가 적지 않은 것 같다. 불교에서는 自他一如라 남의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알고 도우라고 되어 있다. 남들의 고통을 좌시 방관하는 것이 아무리 본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박수를 치며 지지했다면 더욱 큰 죄업이며 공범이나 다름이 없는 행위였다. 그 당시는 사람들이 자신과 그 가족만 안전하고 위해를 받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박수치는 등 협력하였을 것이나 그 죄업(罪業)에 대한 대가(代價)는 언젠가 치르게 되어있는 모양이다. 오늘날 북한인들의 고난과 시련을 좌시하고 외면한다면 남한인들도 비슷한 운명에 빠져서 벌을 받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300만의 북한동포가 굶어죽었다고 하는데 그 중의 과반수는 함경도 지역에서 굶어죽었다고 한다. 김일성의 빨치산투쟁도 함경도인들이 주축을 이뤘으며 1950년대의 김일성독재체제의 주력부대도 함경도 도민들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 와서는 김일성의 직계라는 갑산파(甲山派)가 숙청당하기 시작했으며 김정일치하에 와서는 노동당내의 함경도 출신을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그 여파로 함경도 사람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충성파들도 끝내는 숙청됨으로써 그들의 시대를 마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북한으로 월북했던 남노당의 간부들 그리고 월남에서 반미게릴라투쟁을 끈질기게 계속했던 베트콩들도 공산통일 후에는 거의 숙청당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이 없었다. 현재 북한사람들의 고난과 재앙을 남의 일처럼 보고 있는 남한사람들도 남한이 북한화됨으로 인하여 오늘의 북한사람들의 고난과 재앙을 대물림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남한사람들도 북한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지금부터 적극 참여함으로써 선업(善業)을 쌓아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 갈보리교회의 북한인권모임 후 우리는 어느 한국식당에 안내되어서 생선매운탕으로 식사했고 Mclean에 있는 Crown Plaza Tysons Corner에 들어가서 우리의 여정을 풀 수가 있었다. ●제2일/4월 27일(월) 아침 8시 30분 우리는 버스를 타고 워싱턴 시내로 들어왔다. 워싱턴 여행은 나에게 초행(初行)이 아니어서 버스를 타고오갈 때마다 워싱턴과 그 주변의 풍광(風光)을 즐기는 편이었다. 워싱턴 D.C.의 거리는 방사선이나 바둑판 눈금모양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네오클래식풍으로 세워진 건물들로 채워져 있고 그런 면에서 세계 큰 나라의 수도 중에서도 가장 우아하고 멋있는 도시로 꾸며져 있다. 물도 풍부한 포토맥 강가에 큰 높낮이가 없는 매우 넓은 평야를 차지하며 미술품처럼 아름다운 국회의사당 건물과 그 앞의 공원이나 그 주변은 봄이 되면 벚꽃으로 장식되어 그 일대가 대단한 장관을 이룬다. 일설에는 일본인들이 미국을 정복하겠다는 야망으로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 국화(國花)인 벚꽃을 미국의 수도를 장식해 주겠다고 나선 것인데 미국인들은 그런 일본인의 얕은꾀에 신경쓰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워싱턴 D.C.의 상징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또 워싱턴에는 다른 나라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고층건물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오로지 우아하고 단정하면서도 튼튼한 빌딩들만 적당히 널브러져 있는 것이 또 하나의 개성을 이루어서 수도로서의 위엄을 유지하고 있는 격이다. 미국인들은 어떻게 이처럼 크고 무한히 넓은 비옥한 땅덩이를 공짜로 차지했는지 놀랍다. 미국 이주민들이 아메리카 인디안으로부터 뉴욕의 맨하탄섬을 담요 몇 십장과 총 몇 십 자루 그리고 얼마간의 식품과 술을 주고 교환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외의 땅은 서로죽이고 원수갚기에 바쁜 인디안 원주민들을 쫓아버리거나 몰아내어 손쉽게 차지하였던 것이다. 미국땅은 구시대의 사회적 속박과 종교대립 그리고 이웃 나라들과의 불화와 갈등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기회와 자유를 찾아 나선 유민(流民)들 또는 이주자(移住者) 들이 세운 나라이다. 미국의 원주민들 중에는 시베리아에서 알라스카를 통해서 남하해온 몽골족의 피를 가진 족속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얼굴모양이나 피부색은 몽골족과 비슷했고 이들의 생활습관이나 문화는 원시시대의 한족(韓族)들과 유사성이 많았다. 심지어 가장(家長)이 엄격하고 위엄을 떠는 모습, 웃음이 없고 남들을 의심하며 위압하는 표정 그리고 남과 다투게 되면 끝까지 미워하며 남들로부터 받은 해악에는 반드시 원수로 갚고마는 집요함 등은 조선시대의 양반들이나 사색당파 근성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래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뭉치고 힘을 합하여 외부에서 침입해온 백인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인디언의 부족간 싸움이나 원수갚기에 더 신경을 쓰는 수준 이하의 인종들이었다. 그래서 크고 넓은 미국대륙을 고스란히 백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 하늘은 소견이 좁고 이웃을 미워하며 싸우기를 좋아하는 못난 인간들 보다, 소견이 넓고 이웃과 화합 단결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을 더 사랑하는 모양이다. 우승열패의 법칙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 이주민들에게 천혜(天惠)의 땅으로 주어지며 자유와 풍요의 나라로 키울 수가 있었다. 서로 인종도 배경도 관습도 같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주장을 하다가도 고집부리지 않고 화합하며 상호의논과 협력으로 지역사회를 개발하고 나라를 관리해 나가는 능력, 또 광대한 대륙을 부지런하게 개간하며 연방정부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부변경을 개척했다가 이어서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부유한 경제생활을 누리게 된 것은 미국 이주민들이 이룩한 성취이며 인류의 문명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데 대하여 우리는 그들의 공헌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 같다. 동시에 미국은 세계에 대하여 봉사하며 선행(善行)과 공헌을 해야 할 도덕적인 의무를 떠안으며 출발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미국의 수도가 된 워싱턴에는 건국의 아버지와 몇 사람들의 기념관을 유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미국의 위하여 싸우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알링턴국립묘지를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이것도 미국인들의 슬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1990년대에 와서 미국정부는 그 곁에다가 한국전쟁에서 전몰한 장병의 묘지를 따로 조성하였고 거기다가 한국전쟁에서 악전고투하는 미국병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조형물까지 조성해 놓았다. 이것은 미국이 한국전쟁을 얼마나 중요시 하는가. 또 한국전쟁이 미국을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1950년 당시 한국이란 이름은 들어본 일이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매우 후진 벽지였다. 이런 나라를 지키기 위해 100만명 이상의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에 와서 싸우다가 그들 중 5만여명이 꽃다운 생명을 한국땅에 묻어야했다. 그 뿐이 아니다. 한국에서 죽은 장병 이외에도 한국전쟁에서 부상을 입어서 평생불구가 되어서 일생을 병원에서 지내다가 죽은 이들이 18만이나 된다는 것이다. 2002년에 한국 동두천 지역에서 미국군인이 군사훈련 중에 한국의 여중생 두 명을 장갑차로 치는 교통사고를 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반미운동이 고조했고 밤중의 유령 떼거리와 같은 촛불시위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라를 뒤집어 놓았던가? 각 나라마다 사람들의 인격이 집단화하면 그것이 國格(국격)으로 드러나는 것인데 이런 경우에 한미양국의 국격에도 차이가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우리는 새로 마련된 한국전쟁의 조형물 앞에 헌화하였으며 일행이 묵념하는 가운데 김현욱회장은 정성스럽고도 장중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나서는 차안에 올라와서 한국전쟁과 당시의 참담한 국내상황에 관하여 서로 말들을 교환하였다. 그 당시 한국이 얼마나 못 살고 궁색하며 살기가 어려웠는지, 살기 좋아져 낳고 성장한 젊은 세대는 그 당시를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마이클 호로비츠와 존 보턴씨와의 면담 그 후 우리는 도시의 한복판에 있는 Hudson 연구소의 Michael Horowitz를 방문하였다. Hudson 연구소는 공화당계의 Think Tank(두뇌집단)이며 그 중에도 호로비츠는 미국 변호사이며 법률전문가로서 북한인권법을 손수 만들어 미의회에서 통과시킨 주동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이름 난 지한파(知韓派) 중의 한 사람으로 북한의 대남위협에 대하여 크게 걱정을 하는 인사이다. 그는 우리들의 방문을 크게 기뻐하면서 김현욱회장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자신의 오랜 좋은 친구이며 그의 웃는 모습을 너무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우리들에게 약 30분의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의 요지는 사람들이 북한의 자유문제를 가지고 워싱턴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도 미국에 사는 한국교민들이 모두 나서서 자기 지역의 미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설득하여 북한의 인권신장을 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도록 권유하고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사람들은 물론 한국의 정치인들보다도 더 열심히 북한인들의 안녕과 인권을 걱정하며 한국인들 보다 더 열정적으로 한국을 염려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김현욱회장이 나에게 발언권을 주었기에 나는 한국, 미국과 일본의 식자들이 힘을 합하여 동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는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지역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첫째, 북한의 자유화와 인권관련 활동을 더 활성화하며 또 더욱 격상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둘째, 아시아나 중동지역에서 실추되어가는 미국의 권위와 위신을 부추기며 보완하는데도 기여한다. 셋째, 아시아공동체 건설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보다 많은 선의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또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의 이런 주장에 대하여 호로비츠씨는 적극적인 호응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 보다 더 급한 일부터 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호로비츠의 주장이나 나의 구상(構想)은 상호보완하는 것이지 상호 모순하는 것이 아니다. 호로비츠씨는 단체사진을 같이 찍고 또 개개인이 그 자신과 같이 찍자는 요청을 모두 받아들이는 후의(厚意)를 과시하였다. 그후 우리는 점심을 먹고 미국의 UN대사를 지냈던 John Botton씨를 공화당계의 Think Tank인 금융연구소로 방문하였다. John Botton이라고 하면 코 밑에 하얀 수염을 풍성하게 가진 미국의 과격보수우파라는 이른바 ‘네오콘’의 맹장(猛將)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네오콘의 입장에서는 부시 전 대통령이 초기의 강경노선을 크게 누그러뜨리며 공세적인 외교에서 차츰 후퇴의 기세를 보이게 된 데 대해서도 불만을 느꼈을 것이다. 더구나 이제 오바마정권이 들어서서 미국의 외교정책은 과거의 ‘네오콘’노선으로부터 더 멀어져 가는데 대하여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선 것이 잘 된 일이며 또 오바마 대통령도 그 정부가 들어선 후에 자신이 염려했던 것 보다는 훨씬 잘해서 마음이 놓인다는 말을 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도 당연히 응징해야 하는데 중국이 북한제재를 방해하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중국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강성해질 것으로 보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확실한 응답을 회피하였다. 나는 그의 얼굴표정과 굳어 있는 몸가짐에서 그의 심경과 생각을 미리 읽고 있었기에 더 이상 토론을 벌일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주미한국 대사관에서 있었던 일 오후 4시 30분 일정에 맞춰 간 곳은 주미한국 대사관이었다. 대사관 현관을 들어선 우리는 대사관 직원들의 무성의한 안내에 의아했다. 아니 어찌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워싱턴에 와서 한국대사를 만나려는 사람이 용건 없이 왔을 리가 있느냐? 이런 불만을 하자 참사관은 태도를 바꾸어서 우리 일행을 회의실로 안내하였다. 그러자 한덕수대사는 회의실로 나와서 모두 앉으라고 말하면서 자기도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이런 몸가짐도 외교관의 정상적인 의례나 절차가 아닌 것 같았다. 주인이면 방문자들의 수장을 먼저 알아보고 그에게 합당한 자리를 권한 다음에 자신의 자리도 정해서 앉으면서 나머지 방문자들의 자리를 권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한 대사는 김 회장의 앉은 자리 바로 옆에 덥석 앉아 방문자들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 같았다. 김현욱회장은 국제외교안보포럼에 대하여 그리고 이번 민간외교의 활동에 대하여 대사에게 말하였다. 그런데 한덕수대사는 그런 안보포럼의 민간외교활동이 외교통상부와 어떻게 결부되는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내가 발언권을 얻어서 우리는 NGO단체이다. 근래에 와서 NGO의 활동이 공적인 국가기구보다도 더 중요해져 가는 추세이다. 정부가 자신들이 못하는 일들을 민간인 NGO에 의존하며 NGO들은 국가의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자원봉사하려는 추세가 뚜렷해졌지 않은가. 우리도 정부기구가 공식적으로 하지 못하는 일들을 찾아서 또 손대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일을 한다. 북한의 인권문제는 외무부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제기할 수가 없는 문제가 아니냐? 이런 설명을 하자 한덕수대사도 비로소 마음을 놓는 것 같은 표정을 보였고 우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도 달라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외무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지만 외국에 나와 있는 외무부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대사관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대사와의 면담을 요청한다. 정부의 고위층은 말할 것 없고 늘 별 볼일 없이 돌아다니는 국회의원들까지 거리낌 없이 찾아오는 것이 대사관이다. 공무로 미국에 온 행정부 요인들은 의례히 대사관부터 찾아온다. 그러다 보니 대사관 직원들은 자기의 일을 할 시간이 없어지기가 일쑤이다. 한덕수대사는 본래 외무부와는 상관이 없는 경제기획원의 공무원이었다. 그가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후에 노무현정권에서 우연히 잠시 국무총리를 차지하였지만 그것이 자신이 원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주미한국 대사로 임명된 것도 한미FTA협정을 무사히 치루기를 바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뜻에 의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것이 적절한 인사였느냐고 묻는다면 회의적이다. 한덕수 전 총리는 한미FTA협상의 수석대표로 임명함은 무방하나 매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딪길 수밖에 없는 주미한국 대사자리에 앉히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일일 것 같다. 왜냐? 아무리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던 경제전문가라도 한미FTA협의를 잘 하려면 많은 연구와 자료나 정보수집이 필요하다. 비록 그에게는 적지 않은 수하 직원들이 있고 그를 도와줄 행정관료가 있을 것이나 이런 일은 외무부 직원들에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매일 많은 사람들에게 부딪기는 자리에 있으면서 어떻게 연구하고 준비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오늘도 우리들 바로 전에 한국의 기무사령관 일행이 다녀갔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주미한국 대사는 한국에서 온 기무사령관을 영접하여 그가 업무를 잘 마치도록 배려하며 도와주거나 그의 업무수행을 격려 내지 축하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경제관료 출신인 한 대사가 기무사령관을 도와줄 만한 능력도 식견도 갖기가 어렵다. 같은 고향이나 고교친구라면 모를까 그런 연줄도 없다면 그런 만남은 아까운 시간 낭비며 괴로운 고역일 뿐이다. 북한인권 주간에 미국에 온 우리들 민간외교사절단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북한의 인권문제를 가지고 미국에 오게 된 우리 민간사절단을 환영하며 그 노고를 치하하며 점심이나 저녁이라도 대접해도 좋았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정치권 밖에 있고 싶어 하는 경제전문가나 관료들에게는 아까운 시간 낭비이며 너무나 괴로운 부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민간외교팀에게는 이런 한 대사의 대접태도가 불만스러울 것이나 우리는 대국적으로 양해해 주어야만 할 것 같다. 나오는 길에 우리는 전일 돌아보지 못했던 제퍼슨기념관을 들려서 다시 주변의 경관을 즐겼다. 제퍼슨기념관은 1943년 그의 탄신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건물이다. 주변에서 비교적 높은 곳에 세워졌기에 사방의 워싱턴 주변 경치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 D.C. 시가를 나지막하게나마 내려다 볼 정도라 여러 주요 건물의 지붕 정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을 수가 있었다. 특히 그 동상 바로 정면에는 백악관 지붕이 보인다. 누군가가 말했다. 제퍼슨의 동상은 늘 후배 대통령이 제대로 집무하고 있는가를 감시하고 있는 격이어서 백악관에서 집무하는 대통령이 허튼짓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건국 초기에 제퍼슨과 같은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합심 협력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그후 Great America, Beautiful America로 성장하면서 거의 100년동안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가 있는 원인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미국의 패권적인 위치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고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 233년 동안 하늘이 준 혜택과 기회를 유감없이 살려낸 역대 미국국민과 그 지도층들의 공헌에 대하여 우리는 놀라워하며 축하해 주지 않을 수가 없는 입장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전세계에 퍼뜨리는데 기여한 것이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인권의 가치관이다. 이것은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바람직한 문명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價値)라고 여겨진다. 제퍼슨기념관과 링컨기념관이 수도인 워싱턴에 세워놓은 것도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쓰고 미국헌법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지혜로운 인물이며 링컨은 인간 존엄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노예해방을 단행하고자 남북전쟁을 불사했던 용기있는 정치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미국의 정치발전에 대하여 한마디 더 첨언해 두고자 한다. 미국이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주정치가 비교적 순조롭게 발전을 계속 해왔던 원인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여기서 세 가지 원인을 들고자 한다. 첫째는 주변에 국가를 위협하거나 內政(내정)을 간섭하려는 강대국이 없었다는 점. 둘째는 내부의 갈등을 완화 내지 흡수할 수 있는 무한의 변경지역이 있었다는 사실이며, 셋째는 내용적으로 귀족주의적인 요소와 민중주의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있었으며 상호 균형이 잡혀 있었거나 상호 중화하는 작용을 해왔다는 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필자는 젊었을 때 미국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사고방법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좌경문화가 범람하여 매일 접하는 언론과 방송이 미국과 그 정부에 대하여 빈정대거나 삐딱하게 비꼬며 긁어대는 분위기가 나의 태도와 말투를 바꾸어 놓았으니 이것도 기이한 일이 아닌가? 저녁식사는 前 뉴욕한인회장을 지냈던 분 - 유감스럽게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 이 우리들을 초대했다. 그 한인회장은 얼마 전까지 병으로 입원하여 수술까지 했고 현재는 요양 중이라 했다. 한국에 왔을 때 국제외교안보포럼에도 나온 분으로 뉴욕한인회의 前 간부들까지 불러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 나는 국제외교안보포럼이 이들과 연계하여 민간외교활동을 벌이면 훨씬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 나와 있는 수백만의 교민들은 한국을 위하여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3일/4월 28일(화) 아침 식사 후에 나와서 제일 먼저 가 보았던 곳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Smithsonian Institute of Natural History(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이었다. 그런데 정오에 북한인권 모임이 있는 관계로 10시부터 11시까지만 보기로 하고 들어갔는데 한 시간만 본다는 것은 그저 그 박물관에 발을 들여놓아보았다는 꼴밖에 안된다. 시간이 없으니까 한국관이나 들어가 보자 해서 갔더니 과연 그 전시품들이 이웃 나라들에 비해서 크게 후지고 어딘지 유치하며 조악(粗惡)한 인상을 주어서 구경하는 우리들을 속상하게 했다. 더 좋은 전시물이 있을 터인데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더구나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아마도 김대중이나 노무현정권의 의도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전시된 인물화가 문익환목사인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세계 전지역에서 구경오는 관람객들에게 보여줄 한국의 인물이 그 정도인가? 문익환목사 하면 70-80년대에 국내외에서 가장 부지런하게 그리고 격렬하게 반정부 반체제 그리고 반한(反韓)활동을 선도해왔던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금지구역인 북한까지 비밀리에 드나들며 북측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은 일로 수감되기도 하였고, 그러면서 언제나 좌경운동권학생들의 代父(godfather)와 같은 존재였다. 이런 사람의 인물화를 세계 제일의 자연사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에 설치된 한국관에다 마치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인물처럼 계속 전시해도 되는 것인지? 우리가 귀국하면 여론화과정을 통하여 문화관광부와 관계요로에 알려 다른 그림으로 교체시키도록 건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스미소니언 인스티튜트도 미국의 정부 예산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영국인 과학자 제임스 스미슨이라는 과학자가 1829년 55만불의 유산을 남기면서 종합박물관을 지으라는 유언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하니 잘 나가는 나라는 계속해서 잘되는 운세로 인하여 온갖 복을 누리는 모양이다. 미국 국회광장에서 개최된 북한자유시민대회 스미소니언 인스티튜트에서 나와서 간 곳이 국회의사당 앞의 잔디광장이었다. 11시가 지나고 12시에 가까워지면서 햇살은 사뭇 뜨거워졌다. 그래서인지 잔디광장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멀리 흩어져 그나마 자그마한 나무주변에 모여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행사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더 모여드는 기색이 안 보이자 주최측은 할 수 없이 시작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솔티여사의 사회로 각 단체와 인사들의 연설이 프로그램에 따라서 계속되었다. 각 연사들은 약 10분-15분 정도의 연설을 계속해 나갔으며 김현욱회장도 큰 소리로 또 열렬하게 연설하였다. 다만 크게 아쉬웠던 점은 이런 연설대회가 청중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계속 되었다는 점이다. 나와 우리 일행은 연단 바로 앞 의자에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우리 뒤에는 청중들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김현욱회장도 그 연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연사로서 체격 좋고 목소리 크고 인상적인 연설을 했는데 어느 다른 연사들 보다 나은 편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다만 매우 아쉬운 점은 이런 연설을 듣고 박수를 쳐 줄 청중들이 너무 적었다는 점이다. 나와 우리 사절단 일행은 연단 바로 앞에 의자에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이런 우리들마저 없었다면 어쩔 뻔 했던가? 이런 것을 북한자유화와 인권을 위한 시민대회라고 말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 집회를 주재한 단체가 North Korea Freedom Coalition 인데 이 단체의 실체가 무엇이던가? 내가 아는 바로는 이번 행사에 초청을 받아서 한국에서 오게 된 탈북자 20-30명, 북한자유방송 인사들, 북한 탈북자 연예인들 그리고 우리 국제외교안보포럼도 이 연합체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최측 이외에는 시민들이나 관람자, 참가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 된다. 하기는 이 북한인권행사가 오늘 4월 28일 하루의 행사가 아니라 26일부터 5월 3일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되는 것이므로 오늘 하루의 성과만 가지고 논란(論難)할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한의 인권과 자유’를 촉구하는 국제적인 시민대회를 이렇게 초라하게 치러서 되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북한자유화시민대회나 북한인권궐기대회이든 미국측의 Scholte 한 사람의 머리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국제외교안보포럼과 한국의 몇 개 보수단체와의 연구와 협의를 거쳐서 추진되었어야 했다는 점이었다. 시민대회(rally)라면 최소한 수천명정도의 참가자들은 동원되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터인데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이런 식으로 북한인권이나 자유화 투쟁이 어떻게 힘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원의원 Dan Burton과 상원의원 Sam Brownbag 방문 의회광장의 행사 다음 우리는 하원의원회관에 가서 Dan Burton 의원실을 방문하였다. 이 Burton은 인디애나 주의 공화당 하원의원인데 30년간 그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보통 인물이 아니며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임이 분명하였다.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매우 잘 생긴 사람으로 한국에도 들랑날랑하여 한국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밝은 눈과 식견을 가진 분이며 김현욱회장과는 오래 전부터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온 하원의원이다. 그의 의원실 창 밖에는 의사당 돔이 크게 보였는데 그 돔을 배경으로 원하는 사람들과 단 둘만의 사진촬영을 허용하는 등 우리 일행에 대한 환대와 배려는 극진한 것 같았다. 이어서 우리는 5-6선의 상원의원인 Sam Brownbag의 방을 방문하였다. 상원의원실의 건물은 물론 그들의 방은 넓고 쾌적하며 주변에는 두 개 이상의 보좌관실이나 부속실도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그의 방을 방문하였을 때 마침 상원에서 무슨 긴급회의가 열려서 그는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그 상원회의를 주재하는 그의 말과 모습을 큰 스크린을 통해서 볼 수가 있었다. 그의 보좌관은 그 상원의원이 우리와의 만남의 약속을 지키지 못함을 크게 미안해하며 우리들의 방문과 발언을 빠짐없이 전달하겠다고 나서서 여기서 작은 좌담회가 열렸는데 그 보좌관은 우리들의 발언을 열심히 청취하며 메모를 하였으며 우리가 건네준 문서도 읽어보고 상원의원에게 전달할 것을 약속하였다. 밖으로 나와서 버스에 올라탔을 때 나는 우리 일행들에게 미국의 의회정치와 한국의 민주정치와 크게 다른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한국의 국회제도는 단원제(單院制)인데 비하여 미국의회는 상하양원제(上下兩院制)이다. 미국의 하원(下院)은 임기 3년으로 의원을 선출하는데 초선이나 재선의원은 소수인데 다선의원들이 과반수를 차지하므로 국회의원으로서도 많은 전문지식을 가지며 또 정치인으로서도 품위도 한국보다도 훨씬 높은 것이 엄연한 오늘의 현실이다. 미국의회의 상원(上院)은 各州에서 2명을 선출하는데 임기 6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원의원들 중에는 多選의원이 많으며 보통 20-30년 재직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입법활동에 있어서도 전문지식과 경험이 풍부하며 정치적인 명성(名聲)이나 중량에 있어서도 대통령을 능가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 정치학자들 중에는 상원을 사실상의 귀족원(貴族院)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권위주의적인 성격은 없으면서도 늘 무게 있게 행동하므로 미국정치의 품질(品質)이나 풍격(風格)이 한국과 크게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케네디・오바마 대통령도 초선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들이다. 나이도 젊은데다가 초선의원인 그들이 그 많은 중량급 선배정치인들 앞에서 어떻게 가볍게 거동할 수가 있겠는가?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대통령 앞에서 비굴할 정도로 몸을 조아리거나 혹은 대통령에게 발악적인 경우를 볼 수가 있지만 미국에는 그런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이 미국정치의 품격이나 품질을 보장하는 요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성숙한 민주정치와 미숙한 민주정치의 격차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런 요소는 한미양국의 의회정치에서 두드러진다. 나는 미국의 의회를 주로 밖에서만 보고 의회내부에 들어와 본 적은 있었지만 상하의원의 방과 그 주변을 직접 볼 수가 있었던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고 이것도 나에게는 소중한 배움의 기회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