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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으로 굴절된 한국현대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

- 건국 60년을 되돌아보는 老학자의 감회 -

- 건국 60년을 되돌아보는 老학자의 감회 -
영욕으로 굴절된 韓國現代史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


韓 昇 助 (前 고려대 명예교수)





들어가며

2008년 8월 15일로서 우리는 건국 6l주년을 맞이한다. 1948년 8월 15일은 그 시대를 살면서 부딪쳐 아파하며 많은 눈물과 피도 흘리며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야 했던 우리들 세대의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된다. 우리나라의 해방전후사(解放前後史)는 우리나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떤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대활극(大活劇)이며 지난 60년은 그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렵고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모험적 변환(變換)과 위급상황으로 얼룩져 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식자는 대한민국 건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60년사가 한민족의 5000년 역사 중에서도 가장 활기차고 또 가장 중요한 변혁과 전환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는 보기에 따라 역사상 어느 시대에 살았던 우리 조상보다도 더 보람차고 자랑스러운 역사적인 시기를 살았다는데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하며 우리 선조들과 후손들에 대해서도 막중한 책임을 느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여하에 따라 우리 국민은 세계의 일등국민의 지위로 오를 수도 있고 또 약소국민의 후진성에 묻혀 있다가 쇠멸(衰滅)하는 운명 속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적을 창조해온 나라, 대한민국
대한민국이라는 존재와 성격 그리고 행적(行蹟)에 대해서 평가나 소견이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크게 엇갈린다. 어떤 이는 대한민국정부는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잘못된 정부였다. 한국은 그 정부의 출범에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에 그 후 내내 민족의 분열과 상잔 그리고 온갖 정치적인 불행과 민족비극의 원인이 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대중을 비롯한 좌파인사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좌파세력의 공통된 인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수우파사람들의 시각이나 관점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이후 전세계에도 유례가 없는 고도성장을 지속하여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들이 있겠는가. 만일 개발도상국가들 간에 경제성장을 하여 올림픽경기를 치렀다면 대한민국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근 30년간 평균 8-10%대의 고도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누려 왔으므로 금메달을 계속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은 최근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공인을 받아 왔다. 현재 한국의 국력은 북한에 비하여 거의 50 배 이상으로 평가되며 북한은 더 이상 남한의 경쟁상대가 못된다고 할 정도로 남북체제경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남북의 정통성 여부를 따질 필요조차도 없어져 있는 상태이다.

같은 60-80년대까지 정치현실을 가지고 좌익과 우익의 현실인식과 평가가 어떻게 이 정도로 다를 수가 있는가? 의문스러운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20년 동안에 대한민국의 보수우익의 관점이나 시각은 계속 약세화(弱勢化)되어 왔는데 반하여 친북좌파의 현실인식이나 주장은 계속 강세(强勢)로 변해 왔는데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특히 현재 한국의 40대 이하의 젊은 세대의 역사인식이 거의가 친북좌파의 국가관 내지 현대사관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런 한국의 현실을 외국인들에게 이해시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한국의 역사를 보는 두 시각
오늘의 남북한을 보는 현실인식과 현대사를 보는 시각은 크게 보아서 보수우파의 정통주의(正統主義) 사학과 친북좌파의 수정주의(修正主義) 사학으로 갈라져 있다. 보수우파의 정통주의 사학은 리승만・박정희・전두환시대에 형성되고 유지되어 온 역사인식과 현실관이다. 그에 비하여 친북좌파의 현실인식과 현대사관(現代史觀)은 북한 <조선사>의 시각과 관점이 다름없는 것을 보면 좌파적인 학통(學統)과 인식태도를 이어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좌파적인 현대사 인식은 1980년대 5공치하에서 한길사가 발행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여섯 권의 책과 그와 유사한 간행물에서 영향을 받아 한국의 젊은 학자들과 학생사회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1987년의 6・10시위와 노태우의 6・29선언을 기하여 권위주의체제의 민주화가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이루게 되었다. 노태우정권하에서 시작한 민주화운동은 1993년 김영삼정권을 이어 1998년의 김대중정권과 2003년의 노무현정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미 주류화되어 버렸다, 그 결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반정부 반체제 운동권세력이 주장해오던 민중화(民衆化) 용공화(容共化) 좌경화로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주장해 왔던 민중사학・계급사관・수정주의 사학인 좌경적 관점도 한국의 학계 언론계 지성계의 주류(主流)로 올라 서 있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혁명적인 변화라고 보아야할 현상인데 북한공산주의는 한국의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文化투쟁과 의식화의 수단으로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전혀 사용함이 없이 성취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보수우익세력이 경제면에서 기적을 창출했다면 친북좌경세력은 정치와 문화・사회면에서 우파에 못지않은 큰 기적적인 변화를 이루어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우리가 건국 60주년에서 자축(自祝)한다면 그 초점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까? 노무현정권 말기에 와서 한국의 보수우익세력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여지없이 파괴되고 급속하게 변질되는 한국현실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뒤늦게 나라의 좌경화 추세의 심각성을 인식하며 이러한 좌경화 추세에 저항하며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과거의 좌경정권하에서 잃어버린 10년, 또 김영삼시대를 포함하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15년을 되찾고자 차기 정권만은 좌경세력의 손으로 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좌파후보자들을 밀어내고 이명박후보를 제18대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가 있었다.

이것으로 한국사회의 급속한 좌경화 추세가 일단 멈추어졌으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명박의 여러 가지로 헷갈리는 언행(言行)으로 보아서는 노골적인 좌경화가 속도만 늦추었을 뿐 보수우익 편으로 돌아갈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 실망하여 일부 인사들은 오늘의 초중등학교 학생들이 전교조(全敎組)의 의식화교육을 문제시하면서 좌경화 북한화되어 가는 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는 캠페인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안전보장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못지않게 남한의 초중등학교 교육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지난 7월 30일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례적인 관심 속에서 전교조 소속의 유력한 후보자를 낙선시키며 비전교조 후보자를 서울시교육감으로 당선을 시키는 이변을 일으킨 것이다.

무엇을 기리며 자축하자는 것인가?
이런 현실상황에서 우리는 지난 8월 15일 건국 60주년을 자축하였다. 그렇지만 지난 60년 세월에서 우리가 자축할 내용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가려야 할 일이다. 반공보수세력이 나라를 주도해 나갔던 40년의 국력배양기의 노력과 성공을 자축하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1990년부터 2008년까지의 남북화해기 내지 민주화 용공화 좌경화 추세의 진전을 축하하자는 뜻인가? 아니면 좌우를 차별하지 말고 쌍방이 이룩한 사회변화를 모두 같이 환영한다는 뜻인가?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같지가 않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필자의 추측으로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아왔던 60년을 두루 뭉뚱거려서 축하하자. 그동안의 잘잘못을 가리지 말고 그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변화를 환영하자. 양쪽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며 소중하게 받아들이자는 뜻도 있을 수가 있다. 좋지 않았던 경험이나 실패의 사례도 미래를 위한 참고사항 또는 반면(反面)교사 노릇은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지난 60년 동안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실 중에서도 다음 사실에 중요성을 부여하며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격렬했던 좌우대립의 원인과 의미 (2) 리승만박사의 건국노선 (3) 6・25전쟁과 그 참화 (4) 자유당정권을 종말로 이끌었던 4・19와 5・16혁명의 의미 (5) 유신체제의 성격과 그것이 거둬들인 성과 (6) 제5공화정의 출현과 한국현대사에 미친 영향 (7) 6・10항쟁과 한국정치의 민주화과정 (8)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세 대통령이 기여한 정치변화 (9) 한국의 반공우파와 용공좌파가 일궈낸 나라의 양대 기적과 힘의 뿌리 (10) 내일의 사회변화를 예고하는 오늘의 한국현실 (11) 맺음말-보다 바람직한 건국 100년사를 위하여.


1. 左右대립의 격화는 한민족의 업장인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자유와 해방(解放)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겨레가 바라오던 일이었던가? 그러니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독립국가를 세우고 떳떳하게 잘 살 수 있는 독립국가의 건립을 바랐던 것이나 나라현실은 이상하게 기대나 희망과는 달리 잘못된 방향으로 줄달음쳐 나감에 당황스럽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건국활동 출발부터 공산주의를 신봉하거나 지지하는 젊은 엘리트 세대와 전통사회의 도덕과 관습을 절대시하는 노장(老壯)세대간의 문화충돌로 인하여 처음부터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해방후 노소(老少)간의 대립충돌과 갈등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도처에 싸움판이 벌어진 것을 보면 집단간의 다툼이 일어날 소지가 일제강점기나 그 이전부터 싹트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젊은 세대들의 눈으로 보아서는 노장(老壯)세대의 대부분이 조선조 말기부터 잘 살아온 양반계급의 후손(後孫)들일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하에서도 일본 관헌들과 적당히 협력함으로써 계속 잘 살아왔던 친일(親日)성향의 부르조아계급들이었다. 그러므로 새로이 독립정부를 수립하며 경영하는 일에서는 노장세대는 당연히 물러서거나 배제되어야 할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다.

또 한편에 노장세대의 눈으로 본다면 학교에서 책은 조금 보았겠으나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풋내기 젊은이들이 겁없이 또 염치없이 선배들을 제치고 나랏일을 독식(獨食)하려고 나서니 이를 어쩔 것인가. 그 중 유난히 날뛰는 젊은이들은 거의가 공산주의사상에 물든 무리들이다. 그들은 누구에 대해서도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이며 도든 권력을 자기들 손에 넣어서 정부권력을 독점하려고 드는 뻔뻔한 불량배들, 무례한 음모집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었다.

그 젊은 것들이 나이 많고 사회적인 경력과 평판도 좋았던 나라의 어른들, 스승이나 선배들에게 차마 들을 수 없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모리배 등 불량스러운 욕설과 악구를 퍼부으며 밀어제치려고 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폭력행사를 불사하는 정치깡패들이다. 그들은 해방후에 보수세력이 미처 결집도 하기 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또 9월 6일에는 자의로 조선인민공화국까지 선포하였다. 그리고는 많은 농촌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여 젊은 세대의 세력을 규합하고자 있었다. 결과적으로 남한에서는 처음부터 좌우대립과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으로 인한 남북한의 해방과 독립은 한민족의 자주적인 의지, 노력과 능력만으로 이루진 것이 아니었다. 일본을 패망시켰던 연합국은 1944년의 카이로선언과, 1945년의 얄타회담과 포스담회담선언을 통해서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약속하며 결정했던 일이었다. 종전(終戰)후 미국, 소련과 중국의 외상(外相)들은 1945년 12월에 가서야 모스크바에 모여서 조선문제를 놓고 협의를 한 결과가 조선을 연합국에 의한 5년간 신탁통치에 붙인다는 결의였다.

신탁통치안, 반대할 것이냐 또는 받아들일 것이냐
한국사람은 이런 결정에 놀라고 분개하여 리승만과 김구가 앞장서서 결사 반대운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당수인 박헌영은 평양의 부름을 받아 아마도 소련인 군사고문단장의 설명과 지시를 받고 돌아온 것 같다. 남북의 좌파세력은 신탁통치안을 적극 받아들이라는 지령을 받으며 투쟁방향을 바꾸도록 하명(下命)을 받은 것이다.

1946년 초부터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 덕수궁에서 열리게 되었다. 소련은 조선의 임시정부를 구성하는데 신탁통치안을 찬성하지 않는 정파는 조선임시정부 구성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군정은 보수우파와 일부 중간파가 협의대상에서 배제됨을 알고 소련측 주장을 반대하다 보니 미소공동위원회는 자연 공전되다가 유회되고 말았다. 그 후 미소공동위원회는 두 번 더 열렸으나 소련의 속셈을 알게 된 미군정 장관은 좌파와 보수우파를 배제하면서 김규식 안재홍과 같은 중도파 인사들 내세워서 당분간 남한의 군정관리를 지속해 나갈 생각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리승만 박사로서는 이것 역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가서 맥아더장군을 만났으며 또 미국 안으로 들어가서 미국조야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을 만나면서 한국문제를 UN총회로 넘겨 거기서 한국문제를 해결하도록 설득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소련은 조선반도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철수시킨 다음에 조선문제를 조선인들의 손으로 해결하도록 넘겨주자는 주장을 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한 다음의 한국문제
북한에는 이미 20만의 인민군을 양성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이 2차대전에 쓰던 무기와 또 중공군이 태퍙양전쟁에서 쓰던 무기를 거의 모두 인민군에게 넘겨주어서 강력하게 무장된 군대를 만들어 놓은 상태이므로 소련은 외군(外軍)철수와 조선문제를 조선인들에게 맡기라는 주장을 한 것이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3차에 거쳐서 모였으나 양국간의 이견(異見)대립으로 파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조선노동당의 당수 박헌영은 이른바 신전술(新戰術)이라 하여 미군정이나 보수우익인사들에게 협박하고 가해(加害)할 목적으로 10월대구폭동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무장폭동을 일으켰으니. 미군정하의 치안국, 경찰부대가 공산당의 폭동을 진압하다 역부족함을 느끼자 보수우익 애국단체와 학생조직을 동원하여 좌파들과의 전쟁을 계속해 나갔다.


2. 李承晩박사의 건국(建國)노선

리승만박사의 이른바 1947년의 정읍(井邑)발언이 이러한 상황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요지는 우리는 UN감시하에 남북한 동시선거를 통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나 만일 그런 정부수립이 공산주의자들의 반대로 인하여 도저히 추진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우선 남조선만이라도 독립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치안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것이었다.

1947년 인도인 메농을 단장으로 하는 UN한국선거감시단이 서울에 와서 1948년의 5・10 선거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좌파세력들이 강원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각지에서 게릴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1948년 4윌에는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킴으로써 일시적이나마 제주도가 폭도들의 점령지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1948년 5윌 10일에 시행된 제헌국회의원 총선거도 좌파의 결사적인 반대와 폭행 공격이 감행되는 가운데 치러졌던 유혈선거였다. 그러나 그 어려운 전국 총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제헌국회(制憲國會) 200명의 국회의원들이 리승만 박사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는데 성공하였다. 10월에 제주도의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파병하려던 육군부대가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이른바 여수순천의 군반란사건이다. 국군의 주력부대가 이들을 추적하자 이 반군은 백운산 덕유산 그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게릴라전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리승만박사를 대통령으로 받드는 대한민국정부는 국내의 통치행정체제를 갖추면서 외교활동에도 주력한 결과 1948년 12월 1일에는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한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대한민국의 위상은 이래서 더 높여주었다.

내정면에서는 리승만박사는 전국적으로 농지개혁법을 입법화함으로써 농민의 환심과 지지를 얻었다. 또 노동법도 가장 선진적이며 또 공평한 법안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권익도 충분히 누릴 수가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런 입법은 노동자나 농민들이 앞으로도 공산주의사상에 감염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높이 평가되어도 좋을 것이다.

단독정부를 세우면 한국이 망해버리기나 하듯이 악선전하며 민중을 선동해온 북한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을 선포되자 일주일 후인 8월 21일에 그들도 황해도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회를 열어서 정부수립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8월 25일에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의원을 전국적으로 선출하였는데 여기서는 북한인민이 아니라 남조선의 인민들도 60-70%가 투표에 참가하였다고 선전하였으나 그들의 말이 언제나 그렇듯이 상투적인 허위와 과장된 선전이었을 것이다. 1948년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평양에다 두겠다고 발표하였다.

金九선생의 변신과 비극적 최후
여기서 또 간과할 수가 없는 것은 리승만박사의 동반지도자 김구의 변신이다. 김구는 중국에서 돌아와서 반좌익투쟁에 동참했으며 연합국 신탁통치안 반대투쟁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고위간부인 성시백이 김구에게 계속 접근하여 남한의 단독정부노선을 반대하고 북한과 보조를 같이 하는 남북협상론을 지지하도록 공작을 계속하더니 김구도 꼬임에 빠져서 그쪽으로 차츰 태도를 바꾸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 3월에 북한이 내세운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연석회의에 참가할 목적으로 김규식 조소앙 등과 같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이 벌이는 통일투쟁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있다가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1949년 4월에 평양을 다시 방문하여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연석회의에 참석하여 1950년 6월에 남북한 동시선거를 결의할 것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김구가 다시 그 모임에 갈 것이 분명하므로 이것을 염려하여 어느 쪽에선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김구는 안두희의 손에 의해서 저격당하여 숨졌다.

매우 안 된 일이었지만 김구가 상해의 임정요인이나 중간파 세력을 이끌며 평양과 다시 남북협상을 시도한다면 힘들여 만들어 놓은 대한민국의 존재는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될 것을 염려한 어느 쪽에서 김구선생을 암살하였는데 김구 정도의 애국자가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대한민국정부를 망치려고 드는 것을 방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애국자 金九선생이 좌우합작노선을 쫓다가 김일성 따위와 공모하여 이미 세워진 대한민국을 허무는 일에 동조함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행위였을 것이다.


3. 6・25전쟁의 참극

1950년 6월25일 북한공산군은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넘어서 침공해 들어왔으며 27일 새벽에는 서울로 진입해 들어왔다. 6월 29인가 UN총회는 급히 소집되어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 후퇴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에 불응할 시에는 UN군이 한반도에 상륙(上陸)하여 북한군을 격퇴시키겠다고 경고하였다.

만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더라면 UN이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는 리승만박사의 혜안이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반도의 공산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소련의 스탈린에 의하여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중국대륙이 1949년에 중국공산당의 손으로 넘어갔으니 그 다음 적화(赤化)대상은 한반도일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1946년부터 20만 대군을 육성하였으며 또 중국에서 활약하던 조선의용군 6만도 한국전선에 투입될 준비를 완비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남북통일을 위한 협상이나 좌우합작(左右合作)의 노력은 공연한 요식행위일 뿐 한반도는 무력에 의한 공산화를 면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한반도가 공산화되면 그 다음 공산화 될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이것은 아시아 전체의 공산화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미국은 묵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전후사정을 감안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먼저 미국과 UN총회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아시아 전체의 공산화(共産化)를 저지하는데 리승만박사의 영도력과 맥아더장군의 공로가 지대하였음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생각해 볼 때 조선조가 망한 것이나, 한말(韓末)시대에 위정척사파나 개화독립파 그리고 동학혁명세력이 실패한 것도 고루해진 유교문명에 집착하여 상황적응에 민첩하지 못했던 양반계급의 무능과 무책임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망해가는 청나라에 끝까지 붙어있어서 얻을 수 있는 국가이익이 무엇이겠는가? 러시아와 일본의 쟁패에서 러시아가 밀려나고 일본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바람에 일본의 식민통치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가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에 의하여 접수되고 그 식민통치를 받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한민족의 다른 이복(異腹)동생의 후손들로부터 수모를 모질게 겪은 본가의 자손들의 모습과 같았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일본 강점기에 겪었던 모진 수모와 시련이 도리어 한국을 세계의 상위권(上位圈) 국가로 오르도록 분발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 것이었다.

나라 중에는 하나의 위기극복이 끝나면 다른 위기극복으로, 하나의 성공과 승리에서 또 다른 성공과 승리를 계속 성취하는 나라가 있다. 일본이 그런 나라의 예였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나라는 반대로 하나의 실패가 또 다른 실패로, 하나의 성공에서 또 다른 성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멸망과 비극으로 굴러떨어지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은 청나라에 종속되어 있다가 친러시아로 바뀌었다가 러시아 다음에는 보호국을 일본으로 바꾸어야 했으니 이런 것도 한민족의 업장과 무관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은 우리 국민에게 들이닥친 엄청난 재앙이었다. 국토는 삽시간에 파괴되어 잿더미로 화했으며 남북을 합친다면 수백만이 살상을 당했으며 일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아픔을 되새겼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과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민성격이 과거보다도 훨씬 더 강인해졌다. 자신들의 고난을 용감하게 극복하여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려는 강인한 국민성격으로 바뀌어졌다.

한국전쟁을 겪고 그 전화(戰禍)에서 재기한 한국국민은 과거 조선조의 소극적이며 무기력한 국민이 아니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살고 있었던 게으르고 무책임한 과거의 조선인들도 아니었다. 이런 면을 생각한다면 한국전쟁은 민족의 수난기였다고는 말하나 한민족을 갱생(更生)의 길로 탈바꿈하는 민족재생의 값진 중요한 전환기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리승만정부의 실정(失政)과 4・19, 5・16혁명

리승만정부는 1953년 7월 말의 휴전협정 이후 한국의 전후 복구사업과 민생안전에 주력해야할 위치에 놓여져 있었다. 이런 과업수행에서 세 가지 난관(難關)을 극복해야만 했다. 첫째는 한국의 경제복구에 필요한 경제기반이 너무 취약하였다. 전후의 복구와 경제부흥에 필요한 경제기반이나 자원, 특히 자금 그리고 인적인 자원의 너무 열악하였다. 당시 한국정부가 사용할 수가 있는 재정기반은 미국이 전후복구를 위해서 제공하는 잉여농산물로 마련할 수가 있는 대충자금이 전부였다. 민간자본이고 외국자본도 너무 빈약하여 의지할 데가 없었다.

둘째는 국가경영에 필요한 훈련된 인재도 인력도 없었다. 생산업체를 독립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인물은 물론이고 일제치하에서는 정부의 행정직에서 많은 일을 하고 경험을 쌓은 인제는 물론 나라를 독립적으로 만들고 경영할 수가 있는 경제적인 기반도 없었다. 하물며 독립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나 식자층 등 인적자원이 없었다. 셋째, 그러나 정당정치 지망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대부분 정상배(政商輩)들이거나 리승만정부를 비판하고 반대하려는 야당세들이었다.

리승만박사는 휴전협정으로 불가능해진 실지(失地)를 회복하여 북한지역의 해방과 국토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려면 자신이 계속 집권하는 수밖에 없음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老대통령과 그 주변 인사들의 국가기구운영에 대한 무능과 무책임으로 인하여 리승만 대통령의 인기와 지지는 계속 하락 하고 있었다. 그 반면에 과거의 지주계급이며 명망가(名望家)들로 구성된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보수우익의 야당세력, 곧 저항세력만 계속 강화되고 있었다.

리승만정권의 거듭된 실정(失政)과 인기하락은 1960년의 3・15부정선거가 발단이 되어서 일어난 1960년 4월 19일의 학생의거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로 인하여 李 대통령은 하야(下野)해야만 했으며 미국 하와이에 칩거(蟄居)하다가 돌아가시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후의 민주당 정부는 분열과 파쟁(派爭)으로 정치적 불안정을 드러내다가 5・16군사혁명으로 밀려났다.

국민의 뜻은 높고 욕심은 많았던 자유당의 실정은 되는 일은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욕구불만의 시기였지만 ‘하늘아래 둘도 없는’ 정부라는 말을 듣던 자유당정부도 그 책임을 리승만 대통령에게만 책임지울 수는 없었던 일이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한다.

4・19와 5・16의 혁명성 여부
사람들은 4・19를 학생혁명이라고 하고 5・16을 군사혁명이라고 말한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4・19혁명은 학생의거로 인한 정치변화는 되어도 혁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5・16도 그 자체로 본다고 하면 ‘쿠데타’란 말이 더 어울린다. 학생이나 지식인 집단에 의한 혁명운동은 공산주의(赤色파시즘)나 이슬람과격주의로 귀결되는 경향이 강한데 비하면 군인집단에 의한 변혁운동은 보통의 경우 백색(반공)파시즘으로 귀착되기가 일쑤이다.

한국의 경우로 본다면 4・19를 주도했던 학생세력은 크게 세 파로 갈라졌다. 그 중 일부는 5・16혁명주체 속으로 흡수되었으나 그 수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또 일부는 야당운동의 주류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으나 그 중에서 뜻을 필 수가 있는 사람들은 적은 편이었다. 그 나머지의 학생대표들은 좌파의 지하운동 속으로 잠적하였다. 학생운동의 주류는 1965년의 한일회담반대 시위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친북운동권세력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를 이끌었던 5・16군사정권의 주류는 박정희의 영도 아래 매우 드물 정도로 생산적으로 70-80년대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주동세력으로 활약하였다.


5. 유신체제의 성격과 그것이 거둬들인 성과

1970년대의 한국정치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10월 유신을 박정희의 끝없는 권력욕과 장기집권의 야심 때문에 자행했던 반민주적인 독재정부라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유신독재도 70년대 초반 남북한의 힘겨루기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인식이 달라진다. 실제로 1970년대 초 반에는 김일성이 월남(越南)전쟁을 위한 제 2전선을 한반도에서 펼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며 시도하고 있었던 때였다. 실제로 월남에서 그랬듯이 땅굴도 남쪽으로 여러 개 파내려오고 있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도 월남전쟁을 빨리 종결시킬 목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기도하고 있었던 때였다. 이러한 국가의 안전보장의 위기상황에서 정치권력을 누가 잡아야 하나? 오랫동안 정치권력에 굶주려온 민간인 정당정치인들에게 반환해 주어야 하는가. 이런 것이 자연 중요한 문제가 안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정치를 하자면 정치권력 쟁탈싸움에 맡겨버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박정희가 북한을 상대로 하는 체제유지에 정신을 집중하느라고 여당과 야당간의 권력싸움을 계속 통제하였던 것은 사실이고, 이것이 민주정치의 궤도에서 벗어난 행위임에는 틀림없었다. 유신적 개혁이란 쉽게 말해서 대통령의 권력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대통령을 견제할 국회와 선거권자들을 최대한으로 줄이자는 구상이다. 또 정권유지에 필요한 막대한 경비나 정치자금을 최소화하여 모든 돈과 자원을 중화학공업 육성에 투입하겠다는 박정희의 욕심은 민주정치체제하에서는 용인될 수가 없다.

박정희정권은 이것을 국력의 조직화, 국정능력의 극대화,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말로 압축하며 이것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반정부세력의 분노 와 조소(嘲笑)를 야기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더 격화시켰다. 그로 인하여 유신체제는 10년도 못가서 박 정권의 종말을 재촉하여 파탄나고 말았다.

이런 뜻에서 박정희는 민주정치의 이단자이고 반역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 남북한의 힘겨루기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거둬들인 정책적 효과와 성과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실적을 냈음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박정희가 후세에 위대한 정치지도자로 인정되는 이유는 그가 창조적인 이단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결론부터 말한다면 남한은 국력배양이 극대화하는 동안에 북한은 정치적 경제적인 파탄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남한에서는 4・19학생의거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이어서 군부주도로 국가재건국민운동이 일어났다. 이어서 제1차와 제2차 5개년경제개발에 전력을 투구하였다. 또 한편에는 월남전쟁에도 참전하는 과정에서 경제이익도 크게 챙기고 있는 동안에 북한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북한은 57년도부터 시작했던 7개년경제계획이 실패함으로써 천리마운동도 갈 곳을 잃어버렸다. 북한은 전체주의적인 노력동원운동을 4대 군사노선(軍事路線)과 결부시켜서 체제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북한의 7개년경제계획이 실패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성취목표를 과도하게 설정한데다가 중국과 소련의 분쟁으로 인하여 두 나라로부터 오는 경제지원이 사실상 끊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월남전쟁을 확대함으로써 중국 소련을 재결합시키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두 나라가 자국의 이익챙기기에 바쁜 것이 눈에 보이니 북한도 주체사상을 내세우며 자주노선을 추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한체제는 조선노동당 독재체제로부터 김일성의 우상화(偶像化) 신격화(神格化)를 강화하였으며 김일성의 1인독재체제는 공산세계에 유래없는 족벌체제로 전환되고 그 절대권력은 김일성이 아닌 그 아들인 김정일에게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에 외서 남북간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치열해지는 가운데 남북의 전체주의체제는 더욱 비슷해져 간다. 남북한에서 군부(軍部)의 통제력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남한의 새마을운동과 경쟁하게 되었고 남한의 유신적 체제강화운동은 김일성의 3대 小組운동과의 대결이 되고 말았다. 남한에서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일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동안 북한에서는 김일성체제의 신격화(神格化)와 절대화를 위해 과대홍보 선전하기 위한 대규모 조형(造形)작업에 모든 힘을 투입하고 있었다.

필자는 앞에서 북한의 적색파시즘체제와 남한의 반공(反共)군사파시즘 간에 유사성(類似性) 내지 공통성(共通性)이 있다고 말했으나 1960년대로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동안이 특히 그러하였다. 흥미 있는 사실은 대한민국은 사회의 현대화와 산업화혁명에서 크게 성공한데 반하여 북한은 김일성부자의 족벌(族閥)체제와 신격화(神格化)에 치중함으로써 체제는 사회적으로 낙후하고 경제적으로는 크게 파탄이 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남한은 중화학공업이 뿌리를 내려가게 되어 80년대부터는 막대한 외화(外貨)를 벌어들이고 서울올림픽을 유치했다는 말도 나오게 되니 김정일의 속은 더 열불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꾸며낸 것이 아웅산묘소 폭파사건이며 여기서 한국정부의 요인들이 20여명 가까이 몰살되고 말았다. 또 1987년 KAL기 폭파로 260여명의 한국인 노무자들을 공중에서 폭파되어 시체도 찾을 수 없게 죽어갔다. 그러고도 서울올림픽이 저지되지 못하자 세계평화청년축제를 평양에서 개최하여 전세계청년축제를 강행하다 보니 북한의 재원(財源)이며 외화는 바닥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막대한 외화(外貨)벌이로 돈을 굵어모으는데 바빴지만, 북한의 세계평화청년축제는 엄청난 외화낭비로 끝이 났다. 이어서 1994년의 김일성 사망과 1996년의 수백만 북한주민 굶겨죽이기가 벌어진 것도 김정일의 외화낭비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남한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한편 북한은 파산국가로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 그 말썽 많았던 유신체제였던 것이다.


6. 제5공화정의 출현과 한국현대사에 미친 영향

한국의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고 전력투구했던 유신체제는 그 과업의 무게로 인하여 박정희정권은 무너지게 되었지만 중화학공업의 열매와 단물을 거둬들인 전두환 정권은 단군조선 이래 5000년 역사상 가장 풍족하고 빛나는 발전과 번영의 시기였다. 전두환정권은 박정희가 힘들여서 발전시킨 중화학공업이나 국토건설 그리고 조국현대화 작업을 이어받아서 가장 빛나는 실적을 올렸던 정부이며 경제면에서는 매우 유능한 국가관리자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그런 물질적 경제적인 토대위에서 서울올림픽을 유치하여 그 준비에 만전을 기하여 세계적인 경탄을 자아내어 국위를 크게 선양할 수 있었던 것도 제5공 정부가 이룩했던 성과였음을 부인할 수가 있다. 이런 말이 정확한 말인지 아닌지는 객관적인 자료나 수치를 검토하여 각자가 정확하게 판단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 그리고 현대화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던 리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3인의 정치지도자는 세상에 그럴 수가 없을 정도의 미움과 비난 욕설을 들으며 불명예의 시궁창에서 헤어나지 못해 왔다. 1948년 건국 후 한국전쟁을 겪었음에도 30년 남짓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만큼 나라를 빠르게 산업화하고 나라를 어느 정도로 민주화하면서 현대화하는데 빛나게 성과를 이룩한 나라는 역사상으로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박정희나 전두환은 왜 그렇게 국민들의 미움과 야유 그리고 조롱감이 되어야 했던가?

첫째, 그들이 상대하여 겨루었던 세력이 북한공산주의자들이며 또 남한의 좌익세력들이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과 좌경분자들은 악구, 중상, 모략, 기만과 과장의 술책이나 기법에서 그들을 능가할 사람들이 어느 나라에도 없다. 그런 죄업을 짓고도 건실하게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사실은 모든 공산국가들이 끝내 모두 망해 없어지는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일이다.

둘째, 보수우파성향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결함이나 취약점이란 어떤 것일까? 보수우익세력에 내재하는 공통적인 문제점인 무관심도 우리는 간과할 수가 없다. 또한 공산주의를 불신하고 좌익노선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공출세지향적이며 부와 귀에 대한 집념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대체로 개인주의적이며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갖지 않으며 국가사회나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생각이 희박하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예의바르며 점잖은 편이나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에 대해서는 권위주의적으로 행세하려고 드는 경향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유신체제나 군부권위주의에 대하여 애정이나 존경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며 정부당국이나 권력층에 대한 좌파세력의 선전선동에도 그리 쉽사리 동요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 것이다. 만일 이들이 속물근성을 버리고 국민대중에 대한 존경심이나 자기만 못한 사람들에게 귀족들의 도덕적인 책임감 곧 noblesse oblige 같은 정서나 관습을 보여주었더라면 한국의 보수세력이 젊은 세대나 민중들에게 지금처럼 배척받지 않았을 것이었다.

요컨대 한국의 보수세력의 문제점은 신분상승의 의욕만 강하므로 젊은이들이나 민중들을 천시하는 군인들과 관료계층 등 이른바 관료적 권위주의체제의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금강경에서는 이런 의식을 수자상(壽者相)이라고 말한다. 선배의식, 연로자들의 우월감과 지배욕, 아랫사람들을 대수롭게 보지 않으려는 우월감은 모두 과거지향적인 가치관이며 이런 속물주의적인 정신풍토의 소유자들이 아랫것들에 의해 외면당하고 밀려남은 시대적인 추세였다. 보수우익세력은 이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며 참회해야만 한다.


7. 6・10항쟁과 한국정치의 민주화, 올바른 길로 들어섰는가?

1987년의 6월 항쟁은 군부권위주의시대의 종말을 앞당기며 전두환의 임기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6・29선언을 계기로 노태우시대로 넘어 가게 한 이변(異變)을 일으켰다. 전두환정권도 말기에 들어오면서 통일민주당과 국민당을 비롯한 야당세가 차기 대통령직을 차지할 목적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데 맞서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국회의 다수 의석을 믿고 대통령간선제 개헌으로 막아보려 시도했던 것이다.

야당연합과 다수시민은 이것을 여당의 정권연장의 기도로 받아들였기에 1987년 6월10일에 반대집회를 가졌다. 이것이 폭동으로 번져버리자 전두환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여 간선제 개헌안의 철회를 약속하며 앞으로 자신의 정치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정치적인 소요나 최악의 경우 유혈극(流血劇)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사태를 무사히 넘긴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권위주의체제의 민주화는 아무리 바람직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야당의 민주화요구에 대하여 거의 백기(白旗) 투항(投降)을 한 것은 책임있는 정치세력이 취할 태도가 아니었다.

평소에 민주화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고 있다가 국민의 폭동에 밀려서 또는 반정부세력을 호감을 얻기 위하여 민주화를 야당이나 친북세력의 뜻대로 내맡긴 것도 민주화과정을 오도하는 한심스러운 처사였다.

한국과 같은 여건에서 친북좌파와 연계된 야당과 언론의 주장에 따라서 대통령정부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여 국회와 야당활동의 자유와 권리를 불균형적으로 확대함으로써 국가에 무슨 이익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이어서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던 노태우는 6월 29일 이른바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은 대통령직선제뿐만 아니라 평소에 친북좌파들이 주장해 왔던 여러 가지 민주화조치까지도 망라하여 수용해버린 우를 범한 것이었다.


8.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세 대통령이 기여한 정치변화

6・29선언 후 정부여당과 야당들은 그 선언의 정신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 해 10월 9차 헌법개헌을 추진하였다. 이주천 교수는 이에 관하여 ‘리승만의 48년 체제가 87년 체제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 부여하였다. 48년 체제는 헌법전문에서 3・1운동정신을 계승한 것임을 밝힌 것이었으나 87년의 헌법개정은 그 헌법전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반공국가에서 좌우합작국가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의 대통령후보로 나선 노태우후보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갈라서서 출마했던 야당세를 어렵지 않게 누르고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강력한 대통령 다음에는 부드럽고 소극적인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인 모양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민의를 최대한으로 수렴하며 정치 목표나 업적 보다는 그 과정과 수단을 더 중요시하는 통치스타일을 유지하였다. 야당이나 언론과의 관계도 박정희・전두환시대와는 크게 대조가 될 정도로 매우 매끄럽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억압적인 통치행태가 없어진 반면에 사회치안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어지러워지고 사회불안도 크게 걱정스러울 만큼 커졌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던 노태우의 유일한 관심사는 전두환과는 매우 다르다는 인상을 풍기려는 것이었고 또 전두환의 잔존세력을 없애거나 약화하는 일에 집중되었던 것 같다.

1988년 봄 국회의원총선거에서는 국회의원 공천을 끝까지 지연시켰는데 그렇게 한 주요 목적은 전두환의 직계세력을 최대한으로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정의당 후보는 선거운동을 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여 많은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이것은 과거의 동지나 선배에 대한 배신행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노태우정부는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에서 다수야당이 반대하는 가운데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야당을 여당과 합당케 하는 방법을 궁리하였다.

그 결과 민주정의당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국민당과 합당하여 의외의 과반수를 확보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반대를 일삼아 왔던 야당을 흡수하여 급조된 여당을 가지고 무슨 일을 강력하게 추진 할 수가 있었겠는가? 반면에 합당을 거부하여 야당으로 남았던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1993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하여 제1 야당으로 커질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잡을 수가 있었다.

1992년은 제14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는 해였다. 노태우는 대통령후보로 박태준이 아닌 김영삼을 지명하였다. 오랫동안의 의리를 보아서 박태준을 지명했어야 했지만 그를 대신하여 김영삼을 지명한 것은 김영삼의 비밀폭로 협박을 심각하게 걱정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었다. 박태준은 후보지명을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덤벼들 사람이 아니었으나 김영삼은 반드시 자신을 해코지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결과를 염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은 모두 민중에 영합하고 그들을 선동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행태가 진정 국가와 민중을 위한 것이었는지 또는 아닌지? 사람들의 말이나 제스추어는 그것만 가지고 판단하기가 헷갈리는 구석이 적지 않다. 그래서 그들이 과연 국민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지지에 값하는 인물인지 이런 나의 생각도 편견일 수가 있으므로 남들에게 함부로 말하기도 껄끄럽다. 위에서 말한 세 사람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내가 말하기보다도 많은 국민들이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스스로 판단하여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민주화투쟁과 그의 귀착점
1990년을 전후하여 남북대화를 외면해온 북한이 전쟁준비를 가속화하기 위해 핵무기를 계속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가 미국정부를 긴장시켜 왔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함께 보트를 타며 휴식도 즐겼다. 그러다가 김일성에게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져볼 것을 제안하였고 또 그런 뜻을 서울에 와서 김영삼에게 설득하였다. 김정일과는 대화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김영삼에게는 김일성이나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갖게 됨은 엄청난 호재(好材)였다. 그러나 그 결과를 두려워했던 사람은 필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영삼과의 정상회담에 신경을 쓰며 김정일의 지지와 호응을 얻고자 너무 신경을 쓴 탓인지 1994년 7월에 김일성은 갑작스럽게 심장병으로 죽어버렸다. 김영삼은 기(氣) 싸움에서 이겼나 좋아했지만 또 한편 좋은 기회를 놓쳤음을 아쉬워했다. 북한은 그 후 지독한 한발과 홍수 등 자연재해를 겪었다. 300만이 달하는 북한주민들이 굶어죽었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이것은 김정일이 의도적으로 굶겨죽인 것이라는 말이 자자했다. 김정일은 외국은행에 수십억 달러의 외화를 보유하고 있었고 또 한국정부가 지불을 보증해 주는 조건이라면 10-20만톤의 곡물을 국제곡물시장에서 외상으로라도 도입할 수가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미국 국방성은 북한의 핵무장을 저지할 목적으로 김정일정권을 공격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을 그런 계획을 강력하게 반대하여 미국은 북한 공습안을 철회하였으며 중유나 식량 등으로 회유하는 방법으로 미국의 대북정책을 바꾸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정책의 변화나 김영삼의 평화주장도 북한의 300만 주민들은 굶어죽음을 저지하지 못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김영삼이 미국의 김정일 응징을 적극 만류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핵과 유도탄개발을 저지시키지 못했으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동력만 멎게 하고 나라의 좌경화 바람을 일으키는데 기여했던 최초의 보수우익의 지도자였다는 뒷말이나 평가를 어떻게 면할 수 있을까?

그는 민주주의와 민중주의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식과 능력에서 매우 뒤지면서도 권력과 대중의 박수갈채에 대한 욕심만큼은 대단했던 사람이며 분명 좌파지도자가 아니면서도 주변의 좌파계열의 사람들에게 이용되고 조정되어서 나라의 보수기반의 뿌리를 약화시킴으로써 나라의 좌경화를 촉진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의 서술분석은 박영사 발행, 김운태 편저, <한국정치론-제4 전정판, 2002>이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은 그가 대통령을 하는 동안에 나라를 좌경화로 깊숙하게 유도하여 남남갈등을 유발하면서 국운의 쇠퇴(衰退)와 경제성장의 둔화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와 다르게 남북관계를 개선으로 되돌리고 남북통일의 기반을 닦는데 기여하였다는 이유로 리승만이나 박정희와 같은 수준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햇볕정책이나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의 채택도 앞으로 뜨거운 논쟁거리가 될 것 같다.


9. 한국의 반공우파와 용공좌파가 일궈낸 나라의 양대 기적과 그 힘의 뿌리

보수우파가 이룩한 기적적인 성과란 신속한 경제성장을 말함인데 어떠한 요인들에 의하여 밑받침된 것인가? 이것을 주관적 정신적인 요인과 객관적 물질적인 요인으로 나누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보수우파가 성취해낸 기적적 성과

(가) 주관적 의지적인 요인들
(1) 리승만의 건국노선의 승리.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는 국가가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경제발전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2) 6・25전쟁이 국토를 크게 파손하였으므로 경제재건과 가난추방을 위한 노력이 국가의 첫째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3) 유신독재가 정치적인 대립과 정치자금의 낭비를 최소화할 수가 있었다. (4) 박정희정부가 국민에게 잘 살아 보세. 우리는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 또 우리도 할 수가 있다는 정신과 의식을 심어주었다. (5) 정부는 정부대로 산업화와 경제부흥을 위하여 정부권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또 국민수준에서는 새마을운동으로 잘 살기 위한 국민적 단합을 강화하며 유지하는데 노력하였다. (6) 반공국가를 세워서 국민생활을 잘 단속하는 반공파시즘이 경제개발과 부흥을 일구어 낸 것은 세계사에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나)객관적 상황적인 요인들
(1)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군사적 보호. (2) 한국의 경제개발에 대한 일본의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지원과 협력(일본이라는 세계정상의 문명을 늘 옆에서 접촉함으로 인하여 경제적 및 물질적인 자극이나 도움이 적지 않았다). (3) EU를 비롯한 선진국가들의 한국상품에 대한 개방정책. (4)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을 촉구하는 북한공산주의의 위협과 압력(남한의 군사집단에 의한 반공적 파시즘의 투지를 고취하며 강화시켜준 것이 북한공산주의 적색파시즘의 위협과 압력 때문임).

친북좌파가 만들어낸 기적적 성과

용공적인 친북좌파세력이 남한에서 이룩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좌경화 추진력은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가) 주관적 의지적인 요인
(1) 오랫동안 못살고 푸대접을 받아온 한국의 중하층 서민들의 한(恨), 한국사회의 잘난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억압 내지 핍박, 천대를 받아온데 대한 원한과 보복의지. (2) 외세(外勢)를 등에 업고 설치는 기득권 세력과 부유층 그리고 잘난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보복의지. (3) 미국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대응하며 굴하지 않는 북한의 김정일위원장 및 남한의 좌파정권 또는 유력집단에 대한 지지 성원 협조의지가 작용.

(나) 객관적 상황적인 요인
(1) 오랜 경험으로 대남공작(對南工作)에 숙달된 북한 김정일집단의 꾸준한 지도와 원조 및 지원에 부족함이 없었다. (2) 70년대부터 북한측의 지시에 따라서 활동해온 남한의 반정부 운동권인사들이 현재 남한의 학계 언론계 관계 법조계에서 활동하는 중견간부로 성장해 왔다. (3) 친북좌파세력 안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거물급 인물들이 있어 한국의 정계는 물론 미국의 정계, 관계, 언론계의 지도급인사들과 접촉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재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어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4)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공영방송, 인터넷 사이버언론, 신문(조중동 제외), 잡지, 주간지 등이 거의 친북좌파세력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는 사실.

(5) 한국의 행정부와 언론기관 다음으로 유력한 수십 개의 시민단체들이 정부의 예산지원으로 친북좌파의 중심세력이며 행동부대 구실을 해 왔으며 앞으로도 좌파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주력부대로 남을 것임. (6) 친북좌파세력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우군(友軍)은 대학의 운동권학생세력이며 또 초중고의 어린 후대(後代)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만 명의 전교조(全敎組) 조직이다. 이들이 친북좌파세력의 편에서 활동을 계속하는 한 그들이 비록 대통령직은 차지하지 못했어도 활동력은 무궁무진할 것으로 전망할 수가 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동안에 세계의 경제적 기적을 이룩한 보수우파들과 1970년대부터 2000년에 이르는 동안에 남한을 사회 내부로부터 좌경화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까지 허물어내는데 크게 성공한 상태에서 한국국민들은 건국 60주년을 맞이하였다.

문제는 앞으로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그 미래는 보수우파와 친북좌파세력간의 힘겨루기의 결과에 따라서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 1960-80까지 활약했던 보수우익세력이 이미 70-80줄의 나이로 늙어버림으로써 그들의 활동력을 상당부분 상실하였다. 앞으로 그 보수세력 후속부대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데 관심의 초점이 모아진다.

60-80년대에 이룩한 경제성장의 기적은 21세기에 와서는 기대하기가 어려울 전망이다. 현재 한국은 개발도상국가가 아니며 또 21세기의 경제환경도 3-40년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다. 또 세계와 사회여건도 크게 달라져버렸으므로 종전과 같은 외부의 보호와 지원이 없어진 상태이다. 그러니 한국의 경제가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선진국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과학기술의 수준이든지 정신문화의 깊이에서 앞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나라, 특히 선진국과의 경쟁이 어려울 것이다.

친북좌파가 이룩한 체제변혁의 기적도 앞으로는 전혀 통용(通用)되지 않을 것 같다. 사회주의적 변혁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나 비록 완벽하게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재앙의 문안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할 뿐이며 멸망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종교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재현되거나 불국정토(佛國淨土)가 구현되는 기적이 일어나면 모를까 민중을 선동해서 건설하려는 이른바 진보적 또는 이른바 사회주의국가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가 없는 허상일 뿐이다.


10. 내일의 사회변화를 예고하는 오늘의 한국현실

우리의 사회현실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으며 내일의 사회변화도 오늘의 사회현실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오늘의 사회현실을 말하자면 자연히 2007년 12월 19일에 한나라당의 이명박후보가 500여만 표의 차이로 야당후보를 누르고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또 2008년 4월 9일의 국회의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친북좌파나 기타의 정당후보를 물리치고 압도적으로 많은 국회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대통령과 국회의원선거의 결과를 본다면 그동안 한국을 지배해 왔던 친북좌파의 시대는 끝이 났으며 중도파나 보수우파들이 지배하는 새 세상이 온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친북좌파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MBC와 KBS의 방송매체를 이용하여 미국쇠고기수입을 반대하는 시민운동을 벌였고 이것이 매일저녁 서울의 도심지를 비롯한 전국 도시에 촛불시위로 지속시켰다.

미국쇠고기수입반대 시민여론은 미국쇠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광우병에 걸리게 된다. 그러면 사람의 뇌에 구멍이 뚫리는 병에 걸리게 되는데 이런 쇠고기를 수입해서 되겠느냐. 우리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미국쇠고기를 수입하지 말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물의를 일으킨데 대하여 사과를 해야 한다. 아니 대통령직을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을 확산시키면서 연일 촛불시위를 더 크게 확대하는데 그치지 않고 간간이 과격 폭력시위를 일으켜서 경찰을 두들겨 패거나 납치 폭행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 기세(氣勢)가 너무나 험악하고 위급하다고 판단했는지 이명박 대통령은 방송을 통해서 대국민 사과를 했고, 그것으로 안된다고 하니까 더 간곡한 사죄의 성명을 하면서 여론에 따라서 미국쇠고기의 수입조건을 더 까다롭게 만들기 위해 미국과의 쇠고기협상을 새로 하는 조치도 취해야 했다. 이런 60여일의 촛불시위 소동을 벌이는 동안 500여 명의 경찰들이 크고 적은 부상을 당했으며 크고 작은 경찰차량 2-500대가 파손되었고 민간인들의 재산상의 손해도 수 조원을 윗돌 것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이명박정부가 출범한지 3개월도 안된 시기에 이런 기상천외의 허위선전과 선동으로 나라가 이렇게 흔들렸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미국쇠고기는 2억 3000천만의 미국국민을 포함하여 그보다도 더 많은 외국의 주민들에게도 일상적인 식량이 되어 온 지 아마도 수십 년 내지 100년 이상 지나도록 계속되어 왔던 음식이었다. 그동안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사실을 어째서 한국의 군중들은 그런 기만성 허위보도나 선동성 언론해설을 의심해 보지도 않고 믿으며 과격행동을 벌일 수가 있었는지? 이래서 한국에서는 이변(異變)과 기적(奇蹟)이 끊이지 않는 나라가 되어 있는 모양이다.

미국쇠고기수입반대의 촛불시위가 근 두 달 만에 끊기게 되자, 이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그 바통을 받아서 촛불시위에 다시 불을 당겼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 불교도범종단협의회가 수만 명의 불교신도들을 서울시청 광장으로 동원해 와서 일반국민들의 반정부운동에 기름을 부어대는 것이었다. 그 명분은 이명박정부의 종교차별과 불교억압을 반대하며 이에 대하여 대통령이 사과하고 시정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촛불시위를 주동한 혐의자들에 대한 지명수배나 법적인 처벌을 취소하라는 요구였다.

박정희정권 이래로 반정부 반체제운동의 시위나 민중운동에는 가톨릭 신부와 일부 개신교 목사 및 일부 신도들이 나섰고 불교의 승려는 극소수가 이에 동조하는데 그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처럼 전국의 범종단과 각 사찰의 신도들이 총동원되어 나온 것은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이것은 친북좌파세력의 영향력이 또 그 정도로 강해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친북좌파세력의 종교담당자들의 노력의 대가이며 하나의 큰 개가(凱歌)로 보아진다.

그러나 이러한 이변(異變)이나 기적적(奇蹟的)인 사회현실을 보고 놀라거나 흥분하기에 앞서서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이성적으로 생각 할 수가 있어야 문명사회의 시민구실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명박 대통령이 새 정부를 구성하고 출범한 이래로 종교차별을 공언하거나 불교에 대한 차별적인 조치를 내린 적이 있는가? 우리가 아는 한 그런 일이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 왜 이런 문제로 사과를 요구하느냐? 불교교리에 통치권자는 직접적인 잘못을 하지 않아도 아무나 동네북처럼 두들겨도 된다는 말이 있더냐?

필자가 아는 한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傳來)된지 근 2000년에 오늘처럼 자유와 사회적인 후대(厚待)를 받아 본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 정도이다. 물론 타 종교인들 중에는 불교를 폄하 하대하는 사람들이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대통령이 그런 사실에 대하여 사과를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인지. 엄연한 범법자(犯法者)들에 대하여 법적인 징계를 철회하라는 것은 국가에 대한 부당한 간섭인데 이것은 불교도들이 말할 권리가 없는 일이다. 세간사(世間事)에 개입하지 않는 전통을 지켜온 불교에서 어째서 이러한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되었던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정치불안(政治不安)과 사회혼란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이 대통령직이나 국회와 같은 제도권의 대권(大權)은 친북좌파로부터 비좌파세력 쪽으로 넘어왔으나 시회의 모든 분야를 통제하는 세력이나 영향력은 아직도 친북좌파들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통치권자가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가 있는 경성권력(硬性權力, hard power)은 대통령과 국회의 손에 머물러 있지만 국민의 사회생활에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연성(軟性)권력, 곧 soft power는 아직도 친북좌파들의 손아귀속에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민심의 동향이나 여론을 의식하여 대권(大權)행사를 극히 겁내며 조심하는데, 사회통념이나 관례를 비웃으며 혁파하기로 작정한 친북좌경세력은 겁 없이 생각나는 대로 횡포를 부린다는 현실이다. 그런 결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던 경찰관이 매 맞고 도망가야 하고 불법시위와 폭행을 일삼는 범법자들은 호랑이나 들고양이 노릇을 하고도 두려움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건국 60년이 지났으므로 건국 제2기 60년이 시작된 현시점부터는 과거와 같은 남북갈등이나 좌우대립은 크게 완화되다가 차츰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냐는 기대와 전망을 개진하였다. 그러나 현재 목전(目前)에서 벌어진 엄청난 정치현실을 보아하니 남북갈등이나 좌우대립이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격화되고 더 크게 깨져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갖게 된다. 왜냐 하면 공권력(公權力)을 빼앗김으로써 불안해지고 오기(傲氣)가 더 세져 버린 친북좌파가 물러설 수가 없으므로 더 공격적으로 나오게 될 것이 기정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한국이 앞으로는 모두 잘 될 것이라는 낙관을 할 수가 없는 오늘의 현실이다.


11. 맺음말 - 보다 바람직한 건국 100년사를 위하여

필자의 소견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정통을 이어 받으며 앞으로 더욱 선진화하며 나라를 발전시키려는 보수우익의 후예 내지 후속부대가 출현하여 대한민국의 법통과 전통을 계승하려는 세력으로 커갈 것 같다. 그러나 과거의 보수우익세력과는 다음 면에서 같지 않을 것 같다. 첫째, 제1기의 보수우익처럼 무조건적인 반공이 아니며 좌파의 주장이나 의견을 상당수준으로 포용하며 또 용납할 뿐만 아니라 좌파들과 좋은 협조관계를 유지하려고 힘 쓸 것이다.

둘째, 이들 중에는 보수우익의 편에 서려는 것이 아니라 중도노선을 표방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경우에 따라서는 좌파와 우파로 갈리기 보다는 어느 쪽이 더 국제주의적이고 어느 쪽이 덜 국제주의적이냐 하는 철학과 정책노선의 차이로 대립하게 될 수가 있다.

혁신좌익세력도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어느 지역 정서를 중심으로 하는 친북좌경세력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대부분이 온건중도세력으로 변신하려고 들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친북세력에 의한 영향력은 크게 축소 내지 약화될 것도 같은데 앞에서 보았듯이 그것이 정반대로 튈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김정일의 병환이 친북적인 연방제통일노선을 지연하거나 보류하려고 들 것인지. 그렇다면 2012년 김일성탄생100주년에 통일된 조국을 김일성수령 영전에 봉헌하려는 북측 구상(構想)에 어떠한 변화가 생기게 될까?

제2기의 건국 60년,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하는 글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8・15해방이 아직도 남북갈등과 좌우파대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2008년 현재 정부탄생 60돌 안에 해결하지 못했지만, 다음 60년 동안에는 해결의 수준을 넘어서서 완성의 수준으로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 아니냐?

문제는 지난 60년동안 불가능했던 일들이 앞으로 어떻게 가능해질 수가 있느냐 하는데 있다. 김일성부자가 없어졌다고해도 북한의 체제가 그리고 남한의 친북좌파들이 그들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계승하겠다면 남북갈등과 좌우대립은 변함없이 지속될 것 같다. 또 친북좌파들이 현재 대남혁명공작이 잘 진척이 되어서 보수반동세력도 조만간에 정복될 전망이 보이면 더욱 힘을 얻을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당위론 또는 희망적으로 말한다면 좌와 우의 어느 한 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성숙됨으로써 자연적으로 접근 친화 단합되고, 화해(和解) 통합(統合)되는 방법이 없겠는가? 이것은 남북한의 국민들이 정신적으로 계발, 격상되고 인격적으로 성숙해져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이런 변화가 가능해 지려면 우리국민은 종교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의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 여러 종교가 협력할 수만 있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성 싶다.

사람들은 그것이 한국에서 가능한 일이겠느냐고 의심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우선 뜻을 세워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목표만 올바로 세우면 방법은 얼마라도 찾아진다는 뜻이다. 그 뜻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 행동은 여러 종교집단이 그리고 시민단체들이 동일한 목표를 향해서 자유롭게 추진되어야 한다. 각기 다른 단체들이 추진하는 활동들이 상호 협의하고 조종하여 서로 협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것도 어렵기는 해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보수우파나 혁신좌파나 생각을 달리하지만 정신도덕적인 개선과 문명의 방향전환에 대하여 공동으로 연구하고 실천방법을 함께 고안해 내야 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이미 두 가지 방법을 고안해 놓았다. 첫째는 동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시민운동을 벌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종교단체들이 각기 자유롭게 가능한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도 넓게 모아서 보면 모든 분야와 모든 나라를 포함하게 된다.

둘째는 보살도실천운동이다. 보살도는 자신을 버리고 남들 또는 전체를 위하여 봉사하고 보시하는 정신운동이다. 불교는 보살도라는 편리한 개념이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나라만들기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고 기독교적인 신망애(信望愛)실천운동이라고 해도 된다. 기독교인들이 늘 해오던 일이므로 이런 활동을 동아시아국가와 국민간의 상부상조 내지 상호주고받기, 품앗이활동과 결부시켜서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보수파나 친북좌파는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또 이런 일 이외에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이런 경우 제일 좋은 것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활동이다. 자신의 실천활동을 통하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실천운동을 벌여 보라. 좌파와 우파가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며 적대하며 제거할 의지를 가졌겠지만 앞으로는 그런 마음을 자신에게 돌리고 상대방을 신뢰하고 존경하며 화해하고 봉사하려는 마음으로 바꾸는 태도를 가져보라.

우리가 동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지역주민들을 평화롭게 잘 살게 하자는 것인데 그러려면 정신적 물질적으로 잘 살아야 한다. 물질은 정신의 소산(所産)이고 그림자이다. 정신적으로 잘 산다는 것은 감사와 봉사활동으로 일궈낸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자비의 정신이고 보살도실천운동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문명창조의 주체가 되기 위하여 또 이러한 사고방법이나 가치관의 변화를 통하여 문명의 대전환을 기도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생활양식의 변화와 문명의 대전환 주도하게 될 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있는 200여개 국가와 대동소이한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며 반드시 21세기 세계의 일등국가이며 지도국가가 될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국민은 남들보다도 더 많이 생각하고 연구하며 또 노력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문제는 실천이고 꾸준하게 계속하며 그리고 남들 또는 타 종교집단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만나고 의논하고 선인(善因)과 선업(善業)을 꾸준하게 펼쳐 나가면 한국과 우리 국민들은 하늘의 은총과 큰 복을 받게 될 것이니 말이다. ◇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