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 서울디지털대학 석좌교수
대한민국의 중심이 되어야 할 국회가 요즈음 이상하다.
툭하면 의사당이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오고 처리할 의안이 산더미 같은데 5개월 째 일을 안 한다.
그렇게 놀려면 세비를 국민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박근혜대통령의 질책에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국회의 인적 구성문제,
사회적 배경,
그리고 집단주의적 이념 성향 등을 그 배경적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어느 조사보고에 의하면
19대 의원 300명 중 전과기록이 있는 의원이 61명으로 20%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 27명은 국보법, 반공법 등을 위반한 반국가 사범이다.
이런 인적 구성요소를 가지고 국화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기는 힘들다.
총선 때 이들을 걸러 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까지 기다리면 국민이 입을 피해가 너무 클 것 같다.
다음으로 국회는 대한민국 사회의 현 주소를 반영하고 있다.
사회는 기강이 무너져 거짓말과 탈법∙범법이 횡행하고 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악당들이 입법∙사법∙행정부의 실세들과 손을 잡아 자신들의 방패박이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이 대표적 예다.
정부가 즉시 과학적인 조사팀을 구성해서 법대로 처리했으면 조기에 수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게 해 놓았으니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정치투쟁의 핵심쟁점으로 몰고 간 것이다.
앞으로 대형사건이 날 때마다 특별법을 만들 것인가?
법은 공평하게 그리고 모두에게 똑 같이 적용되는 것을 생명으로 한다.
세월호 사건은 특별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는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일어났다.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게 하니 세월호 사건에 책임이 있는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에게 향할 화살을 피하기 위하여 사건을 엉뚱한 정치쟁점으로 만든 것이다.
끝으로
우리나라 국회는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세기적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개인주의는
인간의 영성(靈性 또는 佛性)이 집단이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고 본다.
거기서는 개인이 존귀하며
집단은 그러한 개인의 집합에 불과하다고 본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생명과 진실을 자신의 증표로 삼는다.
반대로 집단주의는
인간이 물질적 존재이며 정신도 물질의 반영이라고 본다.
개인은 사회를 위해 헌신해야 하며
사회에 기여함으로써만 존재 가치가 있다고 본다.
집단주의는
집단을 유기체 또는 사회적 생명체로 보기 때문에 개체는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고 본다.
거기서는 진실도 그것이 사회적 삶에 얼마나 복무하느냐에 따라서만 의의가 있다.
20세기에 집단주의의 광기(光氣)는
나치즘과 공산주의 그리고 천황군국주의로 나타났다,
소련의 멸망을 끝으로 전체주의 주류가 무너지자
잔여세력들은 서서히 극단적 민족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전체주의 중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북한이 먼저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웠다.
러시아와 중국도 민족주의에 호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일본은 천황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국은 이런 집단주의의 재등장을 적극 막아야 할 입장이다.
이를 막을 유일한 세력은 생명과 진실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의 현대적 버전인 자유민주주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이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
국회는 모든 문제를 사리와 분별 대신에
집단의 힘, 떼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집단주의의 숙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인민민주의적 방식이지 민주공화국의 방식아 아니다.
부처님도 칠불쇠퇴법(칠不衰退法)에서
승가공동체와 세속 공동체의 운영방식으로 집단주의가 아니라
법과 원칙에 충실한 공화주의 운영방식을 설하셨다.
그럼 국회를 어떻게 정상화할까?
문제가 심각함으로 국회를 국가개조의 첫 번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현재의 구성이나 국회를 주도하고 있는 철학으로 볼 때 국회 자체의 개혁은 불가능해 보인다.
국회를 다시 구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현행 헌법상으로 국회해산 방법이 없으니
대통령과 집권당이 리더십을 발휘하여 여야당의 양식 있는 의원들이 국회의원직을 자진 반납하고
선거를 통해 국회를 새롭게 구성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쨌든 극단주의자들의 포로가 된 국회를 하루 빨리 구출해서 대한민국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현대불교신문, 2014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