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독립공원의 문제-①] 국정원 진실위 “사건 관련자들, 실정법 어겨”
[편집자 주] 1998년 12월 개관한 서대문 독립공원(舊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구 도시관리공단 관할)은 日帝(일제)의 고문과 탄압에 의해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지만, 당초의 취지와는 달리 최근 들어 소위 민주화 운동가들(생존한 사람 포함)까지 추모하고 있었다. 서대문 독립공원 內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외벽과 내부에 소위 민주화 인사들의 걸개 그림과 풋프린팅(Foot Printing) 등이 전시되고 있다(9월22일 현재 기준). 서대문 독립공원 소개 책자는 ‘東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조작’이라고 했다. 서대문 독립공원의 運用(운용) 실태를 자세히 조명해 보았다.
(1) 東베를린 사건 기술의 문제점 檢證
東베를린 사건이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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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독립공원 소개 책자 표지 |
1967년 7월8일 金炯旭(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작곡가 尹伊桑(윤이상) 등 서독에서 유학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194명이 관련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적발, 이를 수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中情(중정) 수사발표문에 따르면, 1957년부터 북한은 東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막대한 공작금을 동원해 西獨(서독)과 유럽에 거주 중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포섭 공작을 펼쳤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남한 유학생과 장기체류자들이 포섭됐으며 그 중 11명은 평양에 다녀온 후 평화통일방안 선전과 각계 요인들에 대한 포섭, 선거(6·8국회의원 선거)에서 ‘革新(혁신)인사를 지지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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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독립공원은 소개 책자(32페이지)에 東베를린간첩단 사건을 군부정권이 '조작'했다고 적었다. |
한 대학교수의 제보로 드러난 東베를린 사건
노무현 정권 때 발족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2007년 10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동백림 사건이 적발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67년 4월14일 西獨 주재 조선일보 이기양 특파원이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 대회’ 취재차 체코 입국 이후 실종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中情은 1967년 4월24일 한국여자농구선수단 이재학 감독을 통하여 최초로 李 기자 실종사실을 확인했다.
이 사건을 접한 임석진(당시 국내 대학교수)은 북한이 李 기자를 납치한 것으로 확신하고 자신의 對北접촉 前歷(전력) 노출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돼 자수를 결심했다. 그는 이 사실을 평소 알고 지내던 홍세표(朴正熙 대통령의 처조카)에게 설명했다. 홍세표는 朴 대통령과 임석진의 만남을 몰래 추진했으며 1967년 5월17일 2시간가량 면담이 진행됐다.
朴 대통령은 임 교수로부터 유럽 유학생들의 對北 접촉상황을 듣고 ‘신변에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수사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는 임석진에 대한 조사를 통해 對共혐의자 40여 명에 대한 명단 및 對北 접촉 내용을 파악,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6·8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 있다고 보기 어려워
통상 공안사건의 경우, 정부가 선거 이전에 발표해 여당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게 일반적인 방법이다. 東베를린 사건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朴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의 公安(공안)당국은 6·8 국회의원 선거 이전(1967년 5월17일)에 임석진의 진술을 통해 유럽 유학생들의 간첩 활동을 알고 있었다. 中情은 선거가 끝난 뒤(同年 7월8일)에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東베를린 사건과 6·8 국회의원 선거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진실위 보고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보고서는 “6·8 선거 이전인 6월 초에 수사가 본격화 되었고 수사계획서에 부정선거 대응차원임을 입증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는 점으로 보아 사전 기획조작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됨”이라고 적고 있다. 이를 근거로 “군부정권이 6·8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무마시키기 위해”라고 적힌 소개 책자의 설명은 사실과 차이가 있다. 東베를린 사건은, 한 기자의 행방불명과 그것을 북한 소행이라고 직감한 한 대학교수의 자수로부터 비롯됐다.
東베를린 사건 연루자: 윤이상
東베를린 사건 연루자들의 反국가적 행위는 각종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연루자인 작곡가 尹伊桑(윤이상, 1917~1995)은 북괴로부터 金品(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았다. 1967년 대법원은 윤이상에게 무기징역(金品수수 혐의만 인정되고 간첩죄는 적용되지 않았음)을 선고했다. 그는 복역한 지 2년 만인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돼 西獨으로 추방당했다.
윤이상은 1963년 처음 불법 訪北(방북)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인 이수자 씨는 그의 訪北 이유를 “강서고분의 사신도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었다(출처: 2006년 3월23일字 인터넷 <한겨레>).
윤이상은 김일성이 사망하자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에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美化(미화)·찬양했다. 김일성 역시 윤이상을 칭찬하며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올렸다.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애국지사”라고 치켜세웠다(출처: 2000년 발간된 《김일성 敎示集》).
東베를린 사건 연루자: 이응로·박인경 부부
공군 작전사령관을 역임한 尹應烈(윤응렬) 장군은 회고록 《상처투성이의 영광》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東베를린 사건 연루자들의) 위반 정도가 약했다는 것은 매우 恣意(자의)적인 해석이다. 지금 잣대로는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당시의 급박한 대치 상황에서는 중대한 反국가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 6·8 총선 이전에 위법 행위 당사자의 제보로 수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애당초 정치적 목적으로 기획되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尹 장군은 당시 駐佛(주불)공사로 재직하면서 이응로 화백(1904~1989)과 박인경 부부를 서울로 압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李·朴 부부도 이 사건에 연루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尹 장군은 중앙정보부로부터 ‘李·朴 부부가 간첩 활동에 사용한 송수신기와 亂數表(난수표)를 수거하라’는 지시를 받고 베테랑 수사요원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 物證(물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한 간첩들의 난수표를 보았다. 난수표는 특수 처리된 아주 얇은 용지의 넓이 3.5㎠, 길이 3.0cm 정도 크기였다. 그것은 직경이 담배보다 약간 가늘게 둘둘 말려 프랑스 고루아(golois)담뱃갑 안에 담배와 같이 숨겨져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영광》 中에서)
난수표에는 확대경으로 읽어야 할 정도의 작은 활자가 가득 인쇄되어 있었다고 한다. 尹 장군은, 당시 中情 요원들이 난수표 뿐 아니라 세포조직 명단 및 검거에 대비해 마련한 자살용 청산가리까지 확보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月刊朝鮮> 2003년 7월호는 ‘이응노·박인경 부부가 白建宇(백건우, 피아니스트)·尹靜姬(윤정희, 영화배우) 부부를 북한으로 납치하려 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었다.
“사건 관련자들, 실정법 어겨”
진실위는 上記 보고서 ‘동백림 사건’ ‘결론’ 부분에 “사건 관련자들이 실정법을 어겼고 당시의 남북상황을 고려할 때 이 같은 違法(위법)행위를 중앙정보부가 국가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건 관련자들의 실정법 위반과 위법행위를 인정한 것이다. 다만 ▲유럽 거주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연행 ▲조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등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종합했을 때, 서대문 독립공원 소개 책자가 東베를린 사건을 ‘조작’이라고 기술한 것은 사실과 어긋난다. (계속)
출처 ㅣ 조갑제 닷컴 / 趙成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