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사건은 8・15해방과 건국, 5・16혁명과 함께 한국현대사에서 우뚝서야 할 만큼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국민 각자에게 비쳐진 12・12의 영상은 난무하는 소문에 따라 달라지고, 기자들의 글쓰기에 따라 달라지며, 누가 권력을 잡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의 것이었다. 세상은 각자의 머리 속에 있는 것만큼만 보인다. 역사적 인물, 역사적 사건을 놓고도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것이다. 그러하기에 같은 12・12사건에 대해 전두환 시대의 재판관들은 정승화를 죄인으로 재판했고, 세상이 바뀌어 민주화 세력이 사회여론을 지배할 때에는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까지 위반해 가면서 전두환을 죄인으로 재판했다. 어제의 역적이 충신이 되고 어제의 충신이 역적이 된 것이다. 1979년 12・12사건으로 체포된 정승화는 1980년 3월13일,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내란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10년을 선고 받고 같은 해 3월18일 관할관의 확인조치에 의해 징역7년으로 감형, 동년 3월25일에 항소를 취하함으로써 3월26일 형이 확정되었다. 이어서 1980년 5월 17일 자정에 발령된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와 더불어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된 김대중은 "사회불안조성 및 학생・노조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되었고, 그해 7월31일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의 위반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기소되어 9월17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에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전두환 시대의 법관들은 5・18을 김대중이 불순세력과 연대하여 일으킨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정권이 바뀌어 민주화 시대가 됐다. 1996년 법원은 헌법상에 명시된 일사부재리 원칙을 무시하고 다시 재판을 했다. 1980년에 내렸던 사법부 판결에 무효를 선고하고 판결결과를 정반대로 뒤집었다. "12・12는 신군부의 정치적 야욕이 적용한 하극상 반란행위이고, 5・18은 정권을 탈취한 반란수괴 전두환 일당이 민주혁명을 주도한 광주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내란목적 살인행위이며, 정승화는 억울한 피해자"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전두환을 무기징역에 처하고 2,250억원을 추징했으며, 노태우를 징역 17년에 처하고 2,628억 9.600만원을 추징한다는 판결에 따라 군출신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는 치욕적인 감옥살이를 했다. 지난 1970~90년대의 역사는 김대중-도시산업선교회-위장취업-386주사파로 연계되는 소위 민주세력을 한 축으로 하고, 이들 민주화 세력을 좌익세력으로 간주한 군사정권들을 다른 한 축으로 하는 좌-우 양 진영간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였다. 12・12 및 5・18은 이 두 세력 중 누가 정권을 잡았는가에 따라 파랗게도 되고 빨갛게 되어온 것이다. 5・18을 "광주사태-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5・18을 진압한 전두환 군부세력을 내란세력으로 단죄해야만 했다. 이 설계도에 따라 12・12는 당시 2성 장군에 불과했던 전두환이 4성 장군인 정승화 총장을 불법으로 체포하고,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협박하여 정승화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하극상의 반란사건으로 몰아갈 필요가 있었다. 이런 시나리오에 따라 전두환 등 군부세력은 선전선동에 훈련된 민주화 세력이 장악한 언론과 출판에 의한 여론몰이 인민재판에 속절없이 무너져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내란의 수괴로 몰려온 것이다. 5・18을 "불순한 사태"로 규정한 세력도 정치세력이며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세력도 정치세력이다.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12・12와 "5・18광주사건"은 권력에 영합하는 법관들이 써야 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 위치에 있는 학자들이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수리공학을 전공한 시스템공학자이며 학교 및 연구소에서 수리이론을 매체로 한 분석을 훈련한 사람이다. 수학적 기호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이 책은 수학적 사고방식으로 쓰였을 것이다. 이 책은 12・12에 대해 그동안 그 누구도 접속할 수 없었던 방대한 원천자료를 가지고 수학적 논리로 엮은 한국 최초의 역사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정치권에 빼앗겼던 학문공간을 다 찾기 위한 자유헌장에 대한 선언문이자 금단의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던 판도라 역사에 대해 제2, 제3의 연구를 이끌어 내기 위한 최초의 시도이니만큼 또 다시 필자를 린치하거나 법적인 탄압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는 모처럼 가동된 역사연구를 탄압하는 또 다른 야만이 될 것이다. 필자 역시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기 전에는 12・12를 하극상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방대한 수사자료를 검토한 결과 12・12는 당시 47세에 불과했던 신참 육군소장이 이룩한 위대한 역사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그가 아니었다면 한국사회는 부하를 신뢰하면서 부하의 집에서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풀려했던 박 대통령과 그의 경호원 8명을 순식간에 살육한 패륜아 김재규, 그리고 그를 도와 세상을 장악해 보려던 정승화 군벌들에게 한 시대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사바로세우기 판사들의 판결문대로라면 당시의 정권이 김재규-정승화에게로 넘어가도록 방치했어야 한다는 것이 된다. 박 대통령이 시해당한 10월 26일의 밤에 최규하 총리 이하 수 많은 장관들과 장군들이 보여준 행동들을 보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자리 하며 큰 소리 치던 고관대작들이 얼마나 비열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챙겨야 할 역사로부터의 교훈인 것이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대통령을 방치한 채 제 몸 숨기기에 급급했고, 사고의 진상규명을 명령해야 할 최규하 총리는 김재규가 범인인줄 알면서도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국무회의를 주재했고, 회의 도중 빠져나와 김재규에 가결내용을 귀띔까지 해주었다. 김재규 범행을 눈치 챈 정승화는 국방장관 등 그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김재규가 하라는 대로 계엄군 배치를 직접 주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청와대 경호병력이 궁정동 사고현장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명령을 내려 사고현장을 한동안 은닉시키는 등 컴퓨터보다 더 치밀한 조치를 순식간에 내면서 김재규를 도왔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멀리에서 나는 총소리에 놀라 8시간 이상 숨어다니다 국방부 청사 어두운 계단 밑에서 초병에 의해 발각 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김재규와 한 편이 되었다가 2시간 만에 마음을 바꾸어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밀고했다.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내무장관, 법무장관들은 있으나마나 였고, 대통령 정무수석이라는 사람은 사고 직후 병원으로 사라져 숨어 있었다. 박 대통령이 사라진 이후에는 어른이 없었다. 모두가 김재규와 정승화의 위세에 눌려 소리 없이 몸조심만 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정승화! 그는 자기 행적을 감쪽같이 속이고 대통령보다 더 막강하다는 비상계엄권을 휘두르는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약점을 알고 있는 전두환을 누르고 박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김재규를 감쌌다. 스스로 최규하를 2년 시한의 대통령으로 앉혔고, 김종필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는 과정에 뛰어들어 이를 저지시키는 등 정치를 직접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3군사령관,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을 위시한 수도권 일대에 포진돼 있던 내노라하는 군벌들은 모두가 김재규-정승화 계열이며, 대세는 압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승화를 체포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47세에 불과했던 청년장교 전두환이 이끄는 소수의 군인들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해냈다. 애국심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는 생사를 건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전두환이 대통령 직책을 어떻게 수행했고, 정권 말기에 어떻게 부패했는지 그건 별도의 문제다. 단지 여기에서는 12・12가 하극상이나 쿠데타가 아니었으며, 더구나 군사반란도 아니라는 것만을 수사기록들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