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 서울디지털대 석좌교수
욕구와 탐욕
식탐이 많은 사람은
점심을 먹으러 가서 음식을 한 그릇이 아니라 두 그릇 이상을 먹고 배탈이 난다.
식탐은 배탈에 그치지만
권력과 돈과 명예에 탐심을 내면 잘 나가던 유명 인사들이 패가망신한다.
국가와 같은 큰 집단이 탐욕을 부리면 나라가 패망하고 인류가 불행해진다.
그러나 탐욕과 욕구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취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욕구 자체가 아니라 그런 욕구가 인간에게는 탐욕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데 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탐욕이 권력, 재산, 명예 등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는 탐욕이 우리의 마음을 구성하는 감각 자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붓다의 교설에 의하면
대상에 의해 촉발된 감각에는 즐거운 감각과 괴로운 감각,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이 있다.
그런데 즐거운 감각에는 탐욕의 성향이 있고
괴로운 감각에는 혐오의 성향이 있으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각에는 무지의 성향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이 밝혀낸 인간의 발달과정을 보면
어린 아이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같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를 표현하며
그것이 충족되면 즐거움을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괴로움과 불만족을 느낀다.
아이는 성장하여 사람들과의 유대를 경험하면서
자신에게 즐거운 감각적 욕구를 욕망으로 변화시킨다.
동물은 욕구가 충족되면 대개 거기서 그치지만
인간은 욕구를 넘어 그 이상을 추구한다. 그것이 바로 탐욕이다.
그러나 욕구를 벗어난 탐욕은 채워질 수 없기 때문에 탐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끝없는 불만족과 고통 속에서 산다.
알맞은 양을 깨치기
탐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붓다는 제자들에게
먼저 수식관(數息觀)과 부정관(不淨觀) 등 탐심의 대상이나
그에 대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관법(觀法)을 가르치셨다.
그러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에게 약간 부족하게 느끼는 지점에서 멈출 줄 아는 지혜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자기에게 알맞은 양을 깨쳐서 그만큼만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욕구 자체를 끊는 것이 아니고
즐거운 감각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탐착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탐심을 치유하는 붓다의 대증(對症) 요법은
탐심의 대상과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탐심을 포함한 번뇌를 치유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이 방법으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
성인(聖人)의 지위에 오른 수많은 수행자가 있었음을 불경은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남방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vipassanā,觀)가 유행하고 있는 것은
그 탁월한 대증 치유법 때문이라고 본다.
탐심이 많은 사람에게 관법을 행하게 하면
탐심의 정체를 깨닫게 되고 자기의 필요한 것과 필요한 양만을 취하게 되어 탐욕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관법은 탐심에 대한 대증요법은 되지만 병의 근원을 뽑아내는 근본적인 치유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주 만물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드라의 그물망과 같이 중중무진으로 연결되어 있어
혼자만 탐심을 끊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시-더 나누기
붓다는 근기가 성숙한 제자들을 위해서는
탐심의 근원적 해결 방법으로 대승(大乘)의 덕목인 보시를 가르치셨다.
보시는 대승불교의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중 제일 바라밀이다.
탐진치의 근원을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오랜 동안의 습관,
즉 업의 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받기만 하는 습관을 주는 습관,
나누는 습관으로 바꾸어야 탐욕의 병을 근원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사람들이 받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은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불교는 복(福)을 짓고(作福) 닦으라(修福).고 가르친다.
그런데 받는 것을 좋아하는 인심 때문에 어느 때인가 복을 받으라고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복은 받고 싶다 해도 먼저 지어야 한다.
복을 짓는 것은 은행에 예금하는 것과 같고
복을 받는 것은 예금을 찾아 쓰는 것과 같다. 어느 쪽이 부자가 되는 길인가.
금강경은
선입견이나 편견 등 상(相)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이 허공과 같이 무량하다고 설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실제로 주고 안주고는 따져봐야 하겠지만
우선 무조건 주는 마음을 내면 쌓였던 것이 풀리기 시작한다.
병고에서 벗어나고 재양이 소멸되며 문재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
보시의 효과는 주는 사람 받는 사람,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는 모든 중생에게 확산되어 전 우주적으로 파급된다.
붓다는 자신이 보시의 습관을 생활화했다.
세존은 걸식해온 음식을 3등분하여
3분의 1은 육지중생에게
3분의 1은 수중중생에게 고수레를 하고
나머지 3분의 1을 자신이 드셨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야외에서 음식을 먹을 때 고수레 하는 습관이 있었다.
또한 자신이나 가정에 문제가 잇을 때 먹는 밥을 조금 떼어내어
산이나 냇물의 정갈한 곳에 놓아두는 헌식을 했다. 나누는 문화다.
보시는 부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이야기와 같이 가난한 자의 정성스러운 작은 보시가 복덕이 더 클 수 있다.
부유한 자의 보시는 자기가 지은 업장을 해소하는 방편이 되고
가난한 자의 보시는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보시는
금욕적 자본주의에서 시작되어
탐욕적 자본주의로 변모한 현대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묘약(妙藥)이며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원동력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받는 마음 대신에 주는 마음을 내고,
받는 습관을 주는 습관과 나누는 습관으로 바꿀 때,
병든 사회는 건강한 사회로,
피로사회는 활력이 넘치는 사회로
그리고 분노사회는 인심이 훈훈한 정다운 사회로 변모해 갈 것이다.
(현대불교 2014년 1월 1일 제973호 신년특집-탐진치 줄이기 신문 pdf파일
http://news.buddhapia.com/files/files_news_pdf/2014_01/2014_01_01_973_5.pd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