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차 亞太共포럼 발표내용
주제: 인혁당 사건-좌익운동권의 실체(홍승상의 증언)
강사: 홍승상 (대공수사 전문가, 前 분당경찰서장)
일시: 2012. 10. 9. (화) 오후6시
장소: (사)아태공동체 회의실
인혁당 사건에 대하여 경찰청 보안수사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으며 1960년대에 그 사건을 직접 다루었던 홍승상 前 총경이 아태공포럼에 직접 연사로 나와서 최근 국회에서 논의되었던 인혁당 사건의 전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증언하는 홍승상 前 경찰청 보안수사대장(동영상)
1960년 4・19학생의거가 있던 시기에 김일성은 그 사건을 이용하여 공산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4차 당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60년 4・19의 革命高揚期(혁명고양기)을 이용하여 남한을 공산혁명으로 유도하지 못했던 것은 남한에 공산당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좋은 기회가 다시 올 때 놓치지 않고 공산혁명을 완수할 수 있으려면 남한에 노동당의 지하조직을 만들어 놓아야만 한다. 그런 취지에서 만들어 낸 조선노동당 지하조직이 바로 인민혁명당(인혁당)이었던 것이다.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 활동을 벌이다가 적발되어, 74년에 8명이 사형집행 되었고 6명이 무기징역을 받았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그 무기수들의 재심과정에서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행해졌다. 그러나 대법원 재판에서 소환된 증인들은 이미 8-90세가 넘은 노인들이라 그들은 40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여 말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고문에 의하여 自白(자백)이 강요되었다는 말이 나오자 그 이유로 인혁당 사건이 무죄로 언도(2007.1.23.)되었다. 고문에 의한 자백은 재판에서 인정될 수가 없다는 규칙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래 공산주의 사상범과 마약사범은 고문이라는 수단이 아니고는 그들의 자백을 받아낼 방법이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
그래서 무죄가 선언된 인혁당 사건은 사형된 사람들의 가족들까지 나서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물고 늘어지니 처음에는 1960년대의 재판에서 유죄가 언도되고, 2000년대의 재판에서는 무죄가 언도되었는데 어느 재판 판결이 옳았는가는 역사의 심판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가 박근혜 대표는 피고인의 가족들이 너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니까 유신체제가 헌법을 위반하고 국민에게 많은 고통을 준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한다는 선으로 후퇴한 것이다.
인혁당 이외의 북측 노동당의 두툼한 신임을 받으며 활약한 혁명조직에는 統一革命黨(일명 통혁당)이 있다. 통혁당은 64년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대중투쟁조직이다. 이들은 70년대 북한이 무력남침을 기대하면서 만든 광범한 조직이었다.
증언하는 홍승상 前 경찰청 보안수사대장(사진)
이외에 또 남조선민족해방전선(南民戰)이 있다. 이들은 1974년부터 79년까지 모든 계층을 망라한 폭력혁명투쟁을 이끌려고 만들어졌다. 그 조직원 100명이 검거됨에 따라서 그 조직이 와해되었다.
출처 : (사)아시아태평양공동체 www.apr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