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 사태 때, 북한특수군 대거 잠입했다?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활동했다는 증거들-
이법철 /대불총지도법사
"이것은 광주 5.18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5.18 당시 군군에 대항하여 총격전을 유도하고 벌여온 자들이 북한군의 소행으로 밝혀지게 되어
광주시민, 군인,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가 모두 피해자이며, 가해자는 북한이란 것이 증명되는 것이라"고 한
서석구 변호사의 말을 전제한다-편집자-
대한민국 건국 이래 또하나의 큰 참극인 ‘5,18’ 광주사태 때 북한의 특수부대가 대거 잠입하여 국군과 시민간의 이간질을 위해 총을 들어 한켠은 계엄군을 향해서, 한켠은 시위하는 광주시민들을 향해 암살 저격하듯 총을 발사했다는 설이 그동안 책자와 구전으로 전국을 휩쓴지 오래이다.
그것은 최초 탈북군인들에 의해서 폭로가 되었다. 자그마치 600명 가량의 1개 대대 무장병력이 변장하여 광주사태 때 출현하여 작전을 벌인 것이 드러나는 듯 하다.
특히 국내에서 목소리가 커진 친북, 종북주의자들은 북한 세습독재자를 향해 대를 이어 충복(忠僕) 노릇을 하는 것을 광영으로 알기 때문에 혹여 김씨 왕조에 불리한 문제가 나타나면, 사생결단하고, 언론을 통해서 북한은 “무고하다” 옹호하고 있다. 천안함의 북한옹호가 증명한다. 오히려 북한 세습독재자를 대변하여 대한민국을 향해 맹공을 가해오는 탓에 일부 국민들은 북한군에 무고히 학살을 당하고도 범인이 아군인지 북한군인지, 헷갈리는 경향이 부지기수이다. 5,18 때 북한 특수부대가 대거 광주에 투입되었다는 것에 증거 확실치 않으면 “북핵 맛을 보려는 망발이라” 악을 써댈 것은 불문가지이다.
나는 5,18 때 광주 현장에 시민군들에게 반란의 총을 발사하지 말고 총기를 군당국에 자진 반납하라는 소위 선무작업(宣撫作業)을 위해 광주에서 활동했었다. 나는 광주시내 상무관 안에 총기로 죽은 시신이 하얀천으로 감싸이고, 관 위에 태극기가 덮여져 있는 억울한 시신이 담긴 60여구의 관을 목도하였다. 관 앞에 놓인 사진을 넋나간듯 응시하거나, 관을 안다시피 하면서 통곡하는 어머니들의 비창한 모습은 짙은 향연속에 지금도 눈에 선연하게 보이듯 한다. 그 때, 나는 두 손 모와 합장하여 반야심경만 외울 뿐이었다.
또 한켠에 억울한 국군의 주검을 목도하였다. 내가 상무대를 찾았을 때는 사령관 윤흥정 중장이 교체되고, 소준열소장이 막 도착해 있었다. 사령관 실 가까운 잔디 밭에는 전날 밤 비에 적어 있었는데, 그 축축한 잔디밭 위에 국군의 시신들이 즐비하게 판초우의 아래 누워 있었다. 국가의 명령에 충성을 바치다보니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만 것이다. 광주 국군통합병원에도 가보았다. 병상에서 총상에 의해 죽어가는 국군이 내손을 잡고 아이처럼 울었다. 죽어가는 국군도 울고, 나도 울었다.
나는 아직도 이 광경에는 의혹을 갖고 있다. 장갑차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시내를 달리는 복면의 사내들, 오토바이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무전기 까지 설치하여 달리는 복면의 사내들, 특히 트럭에 가득찬 개인화기로 무장한 복면의 사내들, 그들은 다른 도시로 진출하기 위해 광주시내를 빠져나가려고 결사적으로 행동하여 이를 봉쇄하는 국군과 치열하게 교전하였다. 복면의 사내들은 시내 도처에서 총기를 들고 국군과 대적하고 있었다. 복면의 사내들은 대거, 3000명의 죄수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들 기습했다. 기습 목적은 죄수들에게 총을 들려 대한민국을 향해 총을 발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국군은 죽음을 불사하고 치열한 교전 끝에 교도소를 사수했다. 죄수들이 총기를 들고 모두 난군(亂軍)이 되었을 때를 상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복면의 사내들이 국군과의 전투에 앞장 섰다. 일부 복면의 사내들은 공수부대복으로 변장하거나, 시위진압 경찰의 방호복으로 변장하기도 하였다. 왜 변장했나? 도대체 복면의 사내들은 누구인가?
제기 되는 음모론
북한군의 놀라운 음모론이 제기 되었다. 지난 9월 27일 오후 2∼3시경 서울 정동 경향신문 옆 ‘프란치스코’(천주교 교육회관) 4층에서 기자 회견식의 발표가 있었다. 발표자는 북한인권운동가 김주호박사(가명:북한난민보호협회 대변인, 57세)였다. 그는 최근 접촉해온 북한 요원으로부터 입수한 증거 일부에서 광주에서 죽은 특수부대원들의 시신이 없는 가묘(假墓) 사진과 가묘 앞의 4m 높이의 묘비석(墓碑石), 그리고 특수부대원들이 광주에 밀파되어 작전했다는 증거인 군부대의 작전일지(作戰日誌)를 증거로 공개했다. 묘비석의 뒷면에는 광주에서 죽은 특수부대원들의 이름들이 빼곡이 각인 되어 있었다.
김주호 박사의 발표에 의하면, 광주사태 당시 대거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은 정찰국 특수부대라는 것이다. 침투 군인들은 광주에서 국군과의 교전으로 대부분 사망하여 귀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한당국은 사망한 북한군들의 시신이 없는 가묘(假墓)를 함경북도 청진시 락양동 소련군 해방탑 인근에 조상해 놓았는 바, 비석에 ‘인민군영웅들의렬사묘’라고 묘비명을 썼다. 묘비의 뒷면에는 “홍성표, 리진혁 등 (이름이 기록된 158명)동무 외에 332명의 인민군 영웅 렬사들이 잠들고 있다.”고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은 1998년 2월 8일 묘지를 새로 단장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묘지의 위치는 구글지도에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158명을 포함하여 300명이 넘는 사망자의 ‘죽은 날’이 모두 한 날, 1980년 6월 19일로 기록돼 있어 이날의 의미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종결일’로, 되어 있었다. 즉 남파 됐다가 사망한 자들의 사망일을 일률적으로 6월 19일로 했기 때문에 제삿날이 똑같이 1980년 6월 19일로 된 것이다.
정말 이상한 사실
광주사태가 끝난 후 정부당국은 시민군측과 군인들의 사망자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를 하여 발표 했었다. 신원미상의 사내들의 시신이 있었지만, 1개 대대의 변장한 북한군의 시신은 없었다고 발표하였었다. 그런데 북한군이 진짜 광주에 온 것인가?
침투한 북한군이 가장 많이 북한군이 사망한 것으로 추론되는 곳은 교도소 공격 때라고 한다. 북한군은 노출되었고, 국군은 엄폐물과 진지속에 방어의 교전을 하였기 때문에 북한군은 국군의 총탄에 대거 사망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생존한 침투 북한군은 사망한 북한군의 시신을 모두 수거하여 지정된 곳에 집단 매장하고, 북으로 귀환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이날 김박사는 광주 인근에 북한군이 집단 매장되어 있는 곳을 하루속히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군 1개 대대의 특수군이 광주에서 작전한 것이 속속 정황증거가 드러나는 즈음에 김박사가 제기한 북한군 출동의 음모론이 사실이라면, 첫째, 당시 정보기관과 해안을 방어하는 군경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음모론에 대한 반론
1개 대대의 북한군이 어떻게 광주에 침투해 올 수 있었을까?
북한 특수군으로 광주에 직접 왔다가 훗날 탈북하여 대한민국 품에 안긴 탈북군인 김명국(가명)은 5.18 작전 총화(총결산)를 6월 15일에 했다고 했다. 그는 광주에 온 북한특수군이 4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김명국의 증언에 의하면 칠흑같은 야음을 타고 1개 대대 병력이 모선(母船)으로 서해 바다로 와서 작은 자선(子船)으로 각기 나누워 침투했다는 것이다.
광주사태의 진실을 연구하는 학자나 보수우익 인사들은 오래전에 김명국씨를 공개석상에서 증언 할 수 있도록 노력했었다. 하지만, 공개증언은 우리의 강력한 정보기관에 의해 무산되었다 한다. 왜 진실규명을 못하게 하는 것인가? 친북, 종북인사들이 북한을 옹호하기 위한 음모의 결과인가, 아니면 신뢰할 수 없는 허위정보인 탓인가? 아니면 이한영 처럼 북에서 오는 암살자나 고첩들에게 암살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정보기관이 보호하는 것인가?
1개 대대 병력의 북한군이 밤에 서해로 와서 광주에서 변장하여 첫째, 작전을 벌이고, 둘째, 자신들이 왔다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 동료의 시신은 훗날 찾기 쉬운 곳에 암매장하고, 셋째, 생존자는 북으로 돌아가 ‘인민영웅’칭호를 받았다는 것인데, 과연 가능성이 있는 음모설일까? 김명국씨의 증언이 사실이요, 김박사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물론, 주한미군의 정보기관도 바보 멍청이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주장
광주사태 때 1개 대대의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왔었다는 주장에 입을 삐죽이며, 회의를 품는 인사들에게 가능성을 강조하는 발표자 김주호박사의 동지인 백성업(가명)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1960년대 이래 북한의 도발양상과 규모의 변천에 대하여, 1965년 이전에는 1~2인조로 아군 전방에 침투, 정찰을 위주로 했으나, 1965년 이후 3인조 5인조 무장간첩으로 규모와 양상이 변천 해 오다가 1967년 에는 7인조 9인조로 규모가 늘고 군산 벌교 등 우리의 후방까지 침투해 왔다는 것이다.
이어서 1968년 1월 21일에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해 왔을 때 그 규모와 대담성에 놀랐고, 10개월 뒤 11월에는 울진 삼척 산간 오지에 무장공비를 120여명이나 침투시켜 우리를 아연 실색케 했다며 그때로 부터 만 22년이 지난 1980년 광주사태에 600명을 침투시켰다는 것은 그리 경악할 일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광주사태는 하루아침에 국군과 시위 시민간의 트러블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사태인가, 아니면 국내의 고첩같은 정치인을 위시하여 종북 학생, 노동자 등이 철저히 준비된 시나리오에 의해 준비된 대한민국 전복의 반란의 음모인지, 그것이 가장 먼저 밝혀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결론과 제언
우발적으로 벌어진 광주사태라면, 짧은 시일안에 북한 특수부대의 기동성 있는 참여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사전에 예비 음모된 시나리오에 의해 자행된 광주사태라면, 북한 특수부대는 광주사태 발발전 야음을 타고 광주로 숨어들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할 수 있다. 某언론인은 광주사태 기간만 고집하여 짧은 시일에 어떻게 북한군이 올 수 있느냐,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비된 음모라면, 사전 침투하여 활동하고, 도주로, 사살된 북한군의 흔적지우기를 위해 암매장 장소를 사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주에 온 북한군은 국군의 진압과 봉쇄에 내란에 실패하고 떼주검만 남기고 패주했다.
이날, 김박사가 제시한 증거자료를 살펴 본 서석구 변호사는 “이 정도면, 법적 증거력을 갖는 데에는 하자가 없는 자료”라고 평가 하면서, “일반국민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증거와 자료가 보강되어 누구도 부정하거나 반론을 펴지 못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우리는, 해방 이후 한반도에 김일성왕조를 건설하려는 야욕으로 북한 독재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쳐 대한민국 국민 학살을 부단히 기획, 실천해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광주사태에도 북한군이 대규모로 남파 됐다는 데에 경악과 함께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차제에 북한 세습독재자가 오는 대선에 지지하는 특정 대선후보가 대통령이 되도록 온갖 음모와 책동을 꾸미고, 장차 광주 사태 때보다 훨씬 더많은 군의 규모로 도발해올 수 있을 것에 대비하여 정부와 군은 물론 우리 국민 특히 젊은 세대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李法徹(bubchul@hotmail.com/www.jabg.net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