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는 동기 종교의 첫째가는 사회적 책임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개선하고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며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을 바르게 이끌어 세상을 맑고 향기롭도록 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으로 조계종을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만큼 조계종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기대는 큽니다. 조계종은 국가와 사회적으로 막중한 책임이 있는 종교집단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한 크나큰 지혜와 자비로서 구고구난(救苦救難)하여 사회를 맑고 향기롭게 만들 책임과 역할이 거대종단 조계종에 주어져 있습니다. 조계종의 최고행정수반이 총무원장 스님입니다. 자성과 쇄신 결사본부를 출범시키시고 종단을 실질적으로 끌고 가시는 분이 스님이십니다. 사실상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위치에 계신 분이기에 사람들은 스님의 몸짓 하나하나 말씀 하나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신경을 씁니다. 바로 그러한 위치에 있는 분이기에 개인적 호불호에 관계없이 소납은 총무원장 스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소납은 여러 날의 깊은 고민 끝에 원장 스님께서 큰 용단을 내려주셔야 하는 때임을 역설하며 서한을 띄웁니다. 부디 종단과 종단의 최고행정수반에 대해 소납이 갖고 있는 이 투박한 충정을 헤아리셔서 노엽다 마시고 끝까지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총무원장 스님! 분향 삼배 후 이 글을 씁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법체 평안하신지요? 1. 총무원장은 최고의 신심과 원력을 가진 보살로서 조계종 전체를 책임져야하는 막중한 자리입니다. 1천7백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한국사회에서 늘 주목의 대상이었습니다. 파란의 역사 속에 조계종을 지탱해 온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자화상을 돌아보며 오늘날 종단이 추구하는 바와 조계종 승려들의 존재이유를 새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계종을 두고 창창한 생기감도는 뿌리 깊은 나무를 연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들고 부패하여 다 쓰러져 가는 덩치만 큰 잡목을 떠올리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종단의 이러한 형국을 잘 진단하고 처방하여 치유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최고행정수반인 총무원장스님에게 있음은 너무나도 지당합니다. 불기2556년 8월의 조계종을 두고서 세상과 종단이 느끼는 온도차 그리고 나아갈 방향에 대한 격차가 너무나 큽니다. 세상은 종단에 대해 겉으로는 존경을 보내는 듯하나, 실지로는 비아냥거립니다. 종단이 현 상태대로 지속된다면 그 자체가 우리 시대의 불행이 아닌가 합니다. 근원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절박감이 밀려듭니다. 혹자는 조계종이 아무문제 없으며 잘 굴러가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 인식의 무지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내부가 곪아서 괴사 직전인데 노출되지 않게 가린다고 치유가 된다고 믿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솔직히 고장 난 수레와 같은 종단 시스템과 지도층의 인식은 어디부터 손을 대야 무리 없이 살아날까 가늠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총무원장 스님께서 한국불교와 조계종의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심을 잘 알 고 있습니다. “불교중흥”을 외치신 취임일성도 그렇고, 이후의 ‘자성과 쇄신’ 행보도 그러한 기반 위에 있을 것입니다. 여말선초의 격동기를 지나 조선의 정치적 억불정책, 일제강점기의 왜색불교와 해방 후 노도같이 밀려든 서구문명으로 인해 불교는 제 몸통하나 정비할 경황도 없이 현재에 이르렀기에 일말의 변명의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계종이란 통합종단이 출범한 지 어언 반백년입니다. 오늘날 조계종의 모든 병폐를 불행한 역사의 허물로 돌려버리는 것은 온당하지도 않거니와 양심이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 곳곳에 깊게 뿌리내리게 해야 하는 강력한 책임과 의무가 총무원장 스님에게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스님이 취임하신 이후 지난 3년간 우리 종단이 어떠했는지 냉철하게 돌아보실 것을 요청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쭙습니다! 우리 종도들은 또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이 어둠을 견디며 스러져가는 불교, 외면 받는 불교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가슴앓이를 해야 합니까? 일부 승려들에 의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표종단 조계종을 말입니다. 2. ‘한국불교(조계종)는 죽어가는 집단’이라며 살릴 방도를 알려주는데 외면합니다. 총무원장스님! 저는 조직체로서 조계종과 구성원들이 일대 유신을 통해 건강한 집단으로 거듭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잘 펴기를 바랍니다. 누차 주장하는바 조직이 건강해야 저를 비롯한 현재와 미래의 승려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조계종의 최고행정수반인 총무원장스님의 역할이 중요하기에 종단을 쇄신해서 불교중흥을 이룩할 원장의 출현을 기대해 왔으며, 교주와 종헌만 제외하고는 모두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2007. 11. 1자 통권 578호<신동아> “한국 불교, 살아남으려면 위대한 사판승(事判僧) 찾아라”의 기사는 그야말로 명칼럼입니다. 그 중 마지막 단락인 ‘위대한 사판승을 위하여’의 몇 대목을 소개합니다. △ “지방할거주의가 팽배한 조계종을 하나로 묶고 동국대를 안정시켜 명문으로 발전시키려면 위대한 지도력을 가진 스님이 나와야 한다. 이러한 스님은 깨달음 분야에서도 큰 획을 긋는 존경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이판승의 능력을 갖춘 위대한 사판승이라야 하는 것이다” △ “한국 불교계는 스님에게 사찰경영에 대한 강의를 해야 한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종단 행정학이다. 총무원에는 사회의 경찰이나 검찰 기능을 하는 호법부가 있지만, 신정아씨 사건을 계기로 종단이 내분을 겪을 때 호법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 “조계종은 종헌 외에도 사회의 법률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종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종헌과 종법이 사회의 법이나 관습과 충돌할 때 어떻게 한다는 규정이 없다. 이럴 때 유능한 지도자가 있으면 문제를 풀어 나갈 수 있지만 그러한 인물이 없으면 총무원은 전혀 손을 쓰지 못한다.” △ “이제는 사판승의 시대다. 이판사판에 몰린 조계종과 동국대는 발상의 전환을 꾀해 불교사회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위대한 사판승을 배출할 수는 없을까.” 결국 기자의 눈에도 조계종에 필요한 것은 ▲수행과 운영능력 그리고 존경심이 있는 종단 지도자로서의 총무원장 ▲종단 행정체계의 현대화 ▲분석과 판단이 탁월하고 조정능력이 있는 지도자로서 총무원장 ▲조계종을 일류 종단으로 발전시킬 능력과 자질을 갖춘 CEO형의 수행력이 출중한 자로서 총무원장이 출현해야하다는 주문입니다. 한 마디로 조계종은 총무원장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서 발전과 퇴보를 가름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조계종의 쇄신은 중앙과 지방세력, 각 이해계층 간 충돌과 이기주의로 그 성공이 요원하다는 <신동아>의 주장은 우리의 현실을 잘 조명하는 기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중흥과 쇄신을 가로막고 있는 은산철벽을 파벽할 지도자가 과연 없을까요? 원장스님은 연주암을 비롯하여 기득권을 포기하시라는 불교시민사회의 요구를 대수롭지 않게 묵살하고 계십니다. 90% 이상의 지지를 받고 들어섰으면서도 유신의 성공적인 추진은 고사하고 쇄신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잇달아 보여주고 있는 현 집행부는, 말 그대로 “쇄신”에 목말라하며 간절히 원하는 대다수 불자 종도들의 열망에서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저는 지난 시절, 33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혹자는 새 집행부 탄생에 의미를 부여하며 찬탄하기도 하고, 혹자는 침묵으로 방관하며 자리에 연연할 때 오로지 홀로 거침없이 “야합”이라 주장하여 종단의 화합을 해치는 자로 내몰리는 고충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33대 집행부의 행보를 지켜보며 저의 주장이 빗나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오늘날의 종단현실을 바라보며 지난날에 가졌던 불안한 예감이 적중함에 망연자실할 따름입니다. <신동아>는 기사의 제목을 “한국 불교, 살아남으려면”이라고 달았습니다. 이 말은 현재 한국불교 즉 조계종이 죽어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정확한 진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은 조계종이 청정하고 건강하며 능력 있는 종교집단으로써 세상의 등불이 되고 목탁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우리는 지금 세상에 무엇을 던져주고 있습니까! 지난 3년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진정성 있게 자가치료를 했는지, 병세가 골수로 배어 들어감을 방치한 것은 아닌지, 총무원장 스님의 솔직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총무원장직을 비롯한 종단의 고위직, 본∙말사 주지나 종회의원은 오로지 ‘서원을 완성하기 위한 직분으로서 소임’으로 정착토록 해야 하는 의무가 누구를 막론하고 총무원장이 할 일입니다. 이것이 종단 쇄신의 제1의제입니다. 3. 조계종, 무능하고 향상과 성숙을 외면하는 집단이 됐습니다. 총무원장 스님! 그간 저는 조계종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품 종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수의 정책을 제안하는 등 노력을 해 왔습니다. 이는 스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연장에서 33대 총무원장 선거가 있기 전 당시 모 팀장을 통해 두 장의 의견서(첨부)를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첨부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으나 오늘날의 상황을 예견하고 종단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는 원장스님이 길게 보시고 종권에 도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스님께서 총무원장으로 당선된 후에는 이것이 조계종의 운명인가 여기며 종단 발전안과 총무원장스님의 위상강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였고, 결사추진과 관련해서도 의견을 장문의 문건으로 제안했습니다. 그 동안 원장스님과 종단에 직 간접으로 제시한 것이 결코 적지만은 않습니다. 무엇보다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지정함에 있어 종단결정에 반발하는 명진 스님에 대해 명진 스님을 지지하는 일각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저 만이 <불교닷컴>을 통해 명진 스님을 공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5월에 터진 도박사건과 불법촬영 등 여러 문제로 종단이 힘들 당시엔 의기소침하지 말고 이 사태를 계기삼아 “종단혁신”에 박차를 가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도박 사건이후 대내외적으로 추락한 교단의 위상정립과 순조로운 쇄신을 위해 책자를 제작해서 배포하여, 특히 외부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종단이 들어난 문제들조차도 제대로 된 처결을 회피하고, 종무행정으로 가능한 쇄신안마저도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잘못과 잘못된 시스템에 대한 참회와 발 빠른 자성과 쇄신은 고사하고 적반하장 격으로 되레 세를 앞세워서 큰소리치는 형국’이니 제33대 집행부에 대해 저를 비롯한 종도들이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닷컴>을 승려도박 사건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온갖 명분을 들이대며 징치하는 등 엉뚱한 보복이 난무합니다. 총무원장 스님을 비롯하여 현 집행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언론은 몇 일전 호계원 판결을 “쇄신 포기”라 까지 했습니다. 구차한 것들을 열거하는 것은 제33대 집행부만큼은 조계종의 쇄신을 100% 성공시키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초석은 마련해야 한다는 한 줄기 뜨거운 마음이 있었으나, 근래 들어 어떤 기대의 마음도 접었음을 표명하고자 하는 뜻에서입니다. 조계종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으로써 다종교 현실에서 여러 이웃종교와 경쟁할 수밖에 없고, 상황에 따라 국가(정부)와 시비를 가리기도 해야 하며, 국내외의 학계와는 협력과 경쟁을 거듭하기도 해야 하고 사회의 여러 문제에 참여하며 나침반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가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치명적 약점이 백일하에 드러나 종교집단으로서의 청정성과 존재이유를 부정당하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하면 조계종은 물론 한국불교 전체가 타격을 입습니다. 급기야 승려는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일부라 하나 종단을 쥐락펴락하는 승려들의 호화생활과 국내외 도박 등 치부는 공공연한 사실이 된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행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종단이 쇄신으로 나갈 바 방향을 설정치 못하는 풍토입니다. 이 해묵은 업들을 정제할 집행부의 대책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불교중흥이니, 자성과 쇄신이니 하는 것은 잘 차려입은 비단치마 일 뿐, 종단의 발전을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고서 쇄신을 하려는 자세가 없습니다. 얼마 전 저는 원로의원스님들께 보낸 건의문에서 원로스님들부터 주직 직을 내놓음으로서 기득권 포기의 표상이 되어 주시며, 주직 직 자체가 결코 위상과 존엄성의 표상이 아님을 몸소 증명해 주실 것을 요청 했습니다. 진정한 종단발전을 위해서라면 원로스님들도 개선할 것은 개선해야 한다는 신념에서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종단쇄신에 힘이 되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서원의 틀을 바로 세우고 승려로서의 정체성과 존재이유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정진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해줘야 하는 책임이 총무원장 스님에게 있습니다. 세간 사회로부터는 존경 받는 대표적 불교지도자가 되어야 할 의무와 병든 사회를 맑히는 정화제로서의 역할이 원장스님께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승려도박 사태라는 그 호된 신고식을 치러내고도 종단 지도부는 쇄신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승속을 불문하고 원장 스님과 관련한 온갖 소문만이 난무합니다. 이제 자성과 쇄신 결사는 그 의미조차 상실해 가고 있으니 제33대 집행부가 종단의 희망으로써 존재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현 종단문제의 모든 책임과 해소할 분은 오로지 총무원장스님이시기에 하는 말입니다. 4. 조계종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정통 교설을 부정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위해 존재하는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총무원장 스님! 지난해 이른바 21세기 아쇼카 선언을 추진한 도법 스님은 총무원장 스님이 지휘 감독하는 기구의 수장입니다. 지난해 이 선언을 위해 초법적 행동으로 종단질서를 위협했음에 벌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 간 평화를 위한 노력에 동참하며 선언을 채택하고자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 자체를 문제 삼는 이가 있다면 서구의 관점에서 흔히 말하는 ‘근본주의자’라는 낙인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 안에 어떤 내용을 담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화합을 위한 화합은 진정한 화합을 저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1기 화쟁위원회가 초안한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은 종단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종도들의 혼란을 부추기며, 종교 간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실제의 사회현실을 무시한 “화합을 위한 화합”의 한 전형이었을 따름입니다. 화합을 위한 화합의 영웅놀이를 위해 불교를 희생시켰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명백하게 말해 이것은 기만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모든 종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말하는 그 “진리”란 각 종교에서 그 종교 나름대로 “진리라고 주장되는” 진리인 것이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 각 종교마다 딴에는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 실제 모든 종교계가 다 동의할 수도 없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 진리일 따름입니다. 특정 종교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그 종교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은 기본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종교가 우주섭리와 인간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유일무이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그 종교를 신앙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그 나라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문화의 일부여서? 단지 그 자신의 심리적 적성에 맞는 것 같아서? 신앙이 무슨 커피 종류와 같이 나누어지는 기호식품이라서? 그래서 흥선대원군 박해시절에 천주교인들은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려 자신들의 종교를 이 땅에 정착시켰습니까? 종교를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취미생활이나 학문적 호기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겐 가능한 설명일지 모르나 대부분의 종교인들에겐 결국 자기논리의 모순에 빠지게 만드는 관념어일 따름입니다. 종교가 하나뿐인 사회라면 종교 간 갈등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 간 갈등이 파생되는 원인은 한 사회에 다수의 종교가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종교 간 평화를 유도하는 선언문도 이 점에 유의하여 작성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평화선언’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종교가 귀한 줄 알면 다른 이의 종교도 귀한 줄 알고 그리 대접해야 한다는 상호 호혜의 원칙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위 21세기 아쇼카 선언은 중심주제로 가져가야 할 것을 한낱 악세서리로 만들었고, 오랜 세월을 기독교인들의 전투적 ‧ 공격적 선교와 무례함으로 피멍이 든 불자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종단 고위급들이 21세기 아쇼카 선언의 증명을 거부하신 전임 조정예하께 불경하는 등 내분 양상으로까지 치달았습니다. 사실상 ‘해종행위’였습니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화쟁위는 물론이고 현 집행부는 영웅놀이를 그치고 무엇이 문제인지 진지하게 점검하고 참회하는 자세를 보였어야 합니다. 만약 선언문이 정녕 부처님법에 부합하는 내용이라면, 종립대학의 내 노라 하는 불교학자들을 총동원해서라도 문제가 되는 어떤 구절이 어떤 가르침에 근거하여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되어 부합된다고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어야 합니다. 그러함에도 상처 받은 불자대중은 아랑곳없이 화쟁위와 집행부가 양해를 구한 몇 몇 대중공사는 요식절차에 지나지 않았고, 무엇에 쫓기듯 원로회의를 비롯한 상위 지도부로부터 오로지 빨리 추인받기 위해 얕은 수로 일관함으로써 스스로 그 신뢰를 저버렸습니다. 자신들이 이끄는 종단의 구성원들에 대해 최소한의 애정도, 연민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를 향해 “구세대비!”를 외친다면, 대중은 결국 그 위선적 외침과 행보의 저의에 대해 궁금해 할 것입니다. 문제는 총무원장스님께서도 석가모니부처님의 정통 교설을 부정하고 기독교 신학적 관점의 종교다원주의를 그대로 답습한 이 문제 많은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을 추진하셨다는 점입니다. 근자 제2기 화쟁위원으로 위촉 된 모 인사가 언론을 통해 재추진을 주장하니 참담하기 그지없으며, 총무원장스님에게 저의 결단과 그 결단을 피력하는 이 편지를 작성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임을 말씀드립니다. 불교의 근본 교설을 부정하고, 조계종의 종헌종지를 파괴하는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에 대해 총무원장 스님이 명쾌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은 결국 이 선언을 내용적으로 찬동하신 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5. 성호 스님 문제와 관련한 일련의 사태, 종단을 시궁창으로 쳐 넣었습니다. 총무원장스님! 종단이 내부에서부터 스스로 청정해지면 음해 등 불온문건은 스스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성호 스님 문제를 처리하는 집행부의 방식은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조처가 아니라 문제를 악화시키는 감정적 대응이었습니다. 집행부에서는 원장 스님께서 취임초기부터 주장하신 ‘음해 등 불온문건의 발본색원’ 차원에서 취한 강력한 조처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결국 종단 운영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 착오가 원인입니다. 성호 스님의 『종북 불교를 고함- “룸살롱간 총무원장… 부처가 통곡한다”』 를 읽어 보셨는지요? 이 책 67페이지와 88페이지를 반드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웬만한 것은 이해하는 저도 놀랬는바,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내용이 허위사실이라면 성호 스님은 이미 구속 이상의 조치가 취해졌어야 하며, 사실이라면 총무원장스님은 총무원장직을 사직하셔야 합니다. 67페이지와 88페이지 내용들로 인해 조계종이 시궁창에 쳐 박혔는데 종단은 강력한 형사고발 조치는 물론 일언반구의 해명조차도 없으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그러한 내용 자체가 출판물에 의해 세상에 회자됨은 조계종을 넘어 한국불교가 막장이라는 일대 사건입니다. 이 책 내용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 조계종의 위상은 추락에 추락만을 거듭합니다. 총무원이 회피할 일이 아니라 대중 앞에서 직접, 적극적인 해명으로 추락한 종단과 승가의 위상을 살려야합니다. 또한 <시사인> 245호(5월 28일자)는 “총무원장 쪽 도박·성매수 증거도 나올 것”이라는 제하의 기사의 기자와 대담자의 문답을 일부 소개 합니다. 기자 : 동영상 외에도 새로운 증거가 있는가. 김영국 : 자승 원장과 측근 지도부 스님들이 연루된 강남 오크우드호텔 도박, 필리핀·마카오 원정 도박, 상습 성매수 문제 등에 관한 구체적인 증인과 증거가 있다. 그 내용을 아는 일부 스님들이 이번 기회에 조계종이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보고 양심선언을 시도했다. 그러자 총무원장 측에서 전방위로 회유와 협박을 벌였다. 한 스님은 회유를 받아들였고, 한 스님은 거부한 채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한다. 기자 : 구체적인 내용이 뭔가. 김영국 : 필리핀과 마카오 원정 도박에 따라갔던 ㅎ스님이 최근 불교 언론에 이 사실을 공개하려 하자 총무원 한 간부 스님이 자승 총무원장 대리인으로 나서 양심선언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오는 10월로 예정된 은해사 주지 교체 시 신임 주지 자리에 ㅎ스님이 추천하는 스님을 밀어주겠다고 제의했다. 기자 : 자승 원장이 성매수나 도박에 연루됐다는 증인과 증거가 있는가. 김영국 : 함께한 스님들이 증인이다. 또 자승 스님이 과거 도박장과 룸살롱을 출입할 때 장소 알선과 심부름을 한 ‘해결사’의 양심선언 녹취 기록이 있다. 자승 스님이 주로 출입한 룸살롱 마담이 성매수 사실을 확인해준 인터뷰 녹취록도 있다. 함께 있었던 스님들의 증언도 있다. 총무원장은 이를 은폐하려 하지 말고 진실되게 참회하고 용퇴해야 한다.” 라 한바, 이 기사에 대해서는 왜 조치를 취하지 않는지 의문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의 입장에서는 김영국 대담자가 강도 높은 사법처리를 받아야 하고 종단은 공개적으로 거짓이나 음해라 천명해야 합니다. 사실이라면 총무원장스님을 지지한 모든 승려는 물론 종도들이 평생 죄인으로 참회해야 합니다. 주간지에 이러한 추문의 기사가 등재돼도 납득할 만한 조치가 부재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솔직히 이로 인해 조계종의 승려전체가 매장되는 현실임을 총무원장스님만 모르신다는 것입니까? 일부의 일탈이라고 주장되고는 있지만, 고위직 승려라는 명예를 더럽히는 정재의 사유화와 거액의 도박을 과연 “한 순간 취미”였으니 이해하고 넘어가 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요? 세간에서도 그러지 못합니다. 하물며 최고의 청정성을 갖추어야 할 종단 지도급이 말입니다. 일시, 장소, 법명이 공식 거론되는 도박 등 만연된 사행문화에 대해 사회에서는 조계종을 막가파집단으로 보는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6. 조계종이 도법 스님의 검증되지 않은 꿈을 실험하는 곳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총무원장스님! 원장 스님이 야심차게 추진하신 ‘자성과 쇄신 결사’는 종단 차원에서 기필코 추진해야 하는 일대 혁신과제이어야 함에도 오늘날 그것은 도법 스님의 개인적 이상을 구현하는 마당으로 왜곡 ․ 변형되어버렸습니다. 총무원장스님이 종단 수장으로써 재임 중 종단성과물을 창조하고자 한 ‘자성과 쇄신 결사’가 방향을 잃고 특정인들의 장식물로 전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종단과 총무원장스님에게도 득이 안 되는 일입니다. 저 역시 ‘자성과 쇄신 결사’에 너무나도 큰 희망을 갖고서 2011년 2월 7일 “한국불교중흥, 종단의 자정과 쇄신 5대 결사에 제안”이라는 A3지 16장분량의 계획서를 작성해서 총무원장 스님 등 3원장과 도법 스님 그리고 각부실장에 제안했습니다.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본부장 도법 스님)’가 제 역할을 했다면 제대로 된 쇄신법안이 제정되고 종단 내외에서 적극적인 호응과 더불어 원로회의의 인준을 받아냈을 것입니다. 현재 도법 스님이 본부장인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의 주목적은 종단과 출가대중의 자성도 아니고 쇄신도 아닙니다. 결사추진본부의 그동안의 행보와 현재의 모습으로 보건데, 도법 스님이 늘 주장한 이른바 “생명평화” 운동을 주목적으로 합니다. 자성도 없고 쇄신도 없는, 자성과 쇄신의 거죽만 쓴 희귀한(?) 결사가 종단의 공식기구가 되어 집행부와 원장스님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 아래 삼보정재를 사용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문제가 된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아쇼카 선언)’과 같이 이 조직의 “종교평화위원회” 역시, 민주주의와 상식에 입각한 실질적인 종교 간 갈등해소와 종교윤리의 현실적 공감대 확산보다는 도법 스님 개인과 주변 지지자들의 다분히 추상적이고 이상주의적 관념을 실현하기 위한 일에 천착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운동에 대해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법 스님 나름대로 개인의 철학에 의해 자신의 수행관 인생관을 실현해 가고자 하는 것은 누구도 뭐라고 할 사안이 아닙니다. 스님의 말과 활동에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들 또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소납이 지적하는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도법 스님은 종단의 공식기구를 통해 삼보정재와 인력을 지원 받으며 당신의 개인적 관념과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를 자성도 하지 않고 쇄신도 하지 않는 이상한 기구로 만들면서 말입니다. 생명평화 운동? 물론 필요합니다. 아니, 마땅히 해야 합니다. 통일운동? 역시 해야 합니다. 종교계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면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성과 쇄신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고,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분명할진데, 그 이름을 내건 결사추진본부가 해야 할 일 또한 명확하지 않겠습니까? 작금의 형국은 복막염이 심화되어 패혈증 위기에 있는 환자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성형외과의가 양악수술을 하고 있는 격입니다. 이러니 종단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그 추구하는 바가 혼란스럽습니다. 종단은 통찰력과 불교철학에 기초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국민 불자를 끌고 갈 리더십을 필요로 합니다. 조계종이 바뀌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혁신의 시작은 제대로 된 인사들로 구성해서 인적∙물적 토대가 탄탄해야 하는데 33대 집행부는 감히 진언하건데, 인적∙물적 기초에서에서부터 그러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7. 조계종 중흥과 쇄신의지의 상실, 존재이유를 스스로 저버리고 있습니다. 총무원장 스님! 불교는 사회의 정신적 리더로서는 물론 사회 각 지도층, 교육기관, 의료시설, 복지시설 등에서 타 종교와의 경쟁력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불교는 변방의 제3종교와 다름없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소종단의 난립은 결국 사이비 불교가 판친다는 증거며, 이는 조계종에 전적인 책임이 있음을 부정치 못합니다. 큰 사찰의 수입은 주지 개인의 금고와 다름없기에 종단이 지난번 쇄신 입법에서도 다루었습니다. 총무원장 스님의 한마디, 큰 사찰의 재정을 “100% 투명화 하라!”고 하면 될 일입니다. 쇄신이나 새로운 법을 제정하지 않아도 기존의 법과 의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결국 의지가 문제입니다. 불교중흥과 쇄신을 위한 원칙 운영과 인사의 공정성을 천명하면 될 일입니다. 그 동안 개인치부로 누수 된 정재를 모았다면 종립대학과 연구소, 병원, 복지시설을 수십 개 건립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새어나갈 정재를 막지 못한다면 불교는 일부 승려들만의 황금어장에 불과합니다. 혹자는 그래보아야 그 액수가 얼마 안 된다고 하지만, 조계종의 신뢰도가 향상되어서 세상으로 부터 인정받을 시 그 부가가치는 무궁무진합니다. 종교는 청정과 투명성이 경쟁력임을 정치승려들만이 외면하고 있습니다. 대 정부 대 사회 관계에서도 종단은 비굴합니다. 단순한 예로 도로명 주소 사례, 사랑의 교회 공공도로 점용 사례 등은 이 땅에서 불교는 물론 여타 종교들의 존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를 바 없는 중대 사건인데도 종단은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총무원장스님 취임 초 중국대표단의 무례에 종단은 조치를 취하는 듯 했으나 결국 미적거렸습니다.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 사건임에도 감각이 마비되거나 사고가 정지된 사람들처럼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불교 본연의 가르침은 멀어지고 기복신앙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창조주를 긍정하고 유일신 종교의 행태를 모방하는 언설과 의식이 현대화 세계화라는 미명 하에 묵인되고 있습니다. 모두 정법을 소멸시키는 행위입니다. 지난 3년여 동안 조계종이 외친 “쇄신”, “화합”, “소통”은 말 그대로 구호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지배적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조계종을 비판합니다. 종교집단으로서의 진정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용적으로의 유신은 없었다 해야 옳습니다. 몇몇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스님들이 있고 그 스님들이 쓴 책이 잘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시민들이 불교계 인사들이 저술한 책을 찾고 소셜네트워크에 몰려드는 것은 우리 종단이 잘 해서가 아닙니다. 시대적 사회적 반생명성과 경쟁에 지친 사람들이 욕구를 해소할 피난처를 스스로 찾기 때문입니다. 결코 불교 그 자체나 종단을 긍정해서가 아닙니다. 그러한 그들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나 참으로 불교에 귀의한 자가 될 것인지 의문입니다. 또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종단의 현실에 눈을 뜨고 진저리를 치게 될 때, 어렵게 인연을 맺었던 이들까지도 종국엔 도리질을 치게 될 것임은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지요? 대체할 피난처는 한국불교의 몇 몇 매력적인 승려가 아니래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조계종은 몇 명의 유명 승려가 아닌 “조계종 자체의 위신력”이 필요한데 과연 우리는 그러한 노력을 하는지요? 8. 한국불교와 종단을 위해 “용퇴”라는 큰 용단을 내려 주십시오! 감히 원장스님께 말씀드립니다. 오늘날 승가는 “무기력, 무소신, 무질서” 화 해 있습니다. “최소한의 정도와 바른 소리”마저도 외면하고 눈치 보기에 급급합니다. 바른 소리하는 자를 겁박하는 지경입니다. 교단에 대한 애정, 신심과 정의감이 소멸되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한국불교의 위기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종단적 병폐를 자승 총무원장스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 설사 원장스님에게 불리하고 불이익한 일이라 해도 과감히 개선하고 치유하셨어야 합니다. 총무원장스님 스스로 지난 재임기간을 상기해 보시기바랍니다. 종단의 쇄신보다는 오로지 내분, 갈등, 온갖 추문으로 점철된 시간이었습니다. 과연 남은 기간은 어떠할까요? 제 말이 심한 듯하나, 한국불교는 아니 조계종은 살활을 걸고 세상과 타 종교와 경쟁해야하는 현실을 인식한다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자승 총무원장스님의 주도하에 정녕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조계종은 실험대상도, 개인이나 몇몇 사람의 것도, 적당히 넘어가면 되는 집단도 아닙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한국불교를 살리고 종단을 쇄신할 방도가 현 집행부 체제로서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파란이 또 어떤 방식으로 몰아칠지 장담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총무원장 스님, 더 늦기 전에 종단의 평안과 건강성을 담보할 지도자의 출현을 위해 큰 용단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설사 지금보다도 더 못한다 해도 종단은 무엇인가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입니다. 무례한 진언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산산이 흩어지고 상처받은 불심을 자승 총무원장스님 체제 하에서는 치유할 수도, 희망을 가질 수도 없다는 하소연을 저 또한 더는 외면하지 못하겠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자성과 쇄신의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을 가슴 울리는 특단의 조치가 취해진다면 쓰디쓴 세월 인내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원장스님 체제 하의 집행부에서 그러한 희망이라곤 그림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가슴이 먹먹하도록 공감이 느껴지는 진정성이란 하릴없는 몽상가의 꿈에 지나지 않았음을 거듭 확인할 뿐입니다. 지난 3년간 너무나도 많은 허물이 쌓였습니다. 소멸은커녕 앞으로도 더욱 더 많은 허물이 쌓일 것은 자명합니다. 총무원장 스님! 조계종을 어찌하실 것입니까? 자승 스님! 총무원장이라는 그 자리를 미련 없이 던져버림으로써 종단과 스님 스스로를 훌훌 자유롭게 하십시오. 그 동안의 허물을 상쇄하고도 남을 용기 있는 선택으로 큰 공덕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앙망할 따름입니다. “자승 스님, 이제 그만 ‘용퇴’라는 큰 용단을 내려 주십시오.”라 말하는 저 또한 엄청난 괴로움 속에 있습니다. 부디 큰 용단으로 한국불교 중흥의 진정한 계기와 거름이 되어 주십시오! 나무, 불. 법. 승 불기2556(2012)년 8월 8일 法應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