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성지순례는 간다라미술과 함께 - 파키스탄 간다라 여행기 손경희 아시아태평양공동체 간사 나는 4월 26일부터 5월 3일까지 6박 7일 일정으로 파키스탄정부의 초청으로 간다라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파키스탄 정부차원에서 민간단체를 정식으로 초청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순례단은 대불총 박희도 회장을 단장으로 한 대불총의 임원 회원 16명과 <법화경과 신약성서>의 저자인 민희식 교수팀 3명을 포함하여 19명이 대승불교의 발원지인 간다라의 불교문화 유적지를 돌아다녔다.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간다라 불교미술여행이 본격화 될 3일째인 4월 29일 저녁에 주파키스탄 한국대사관에서 대사일행이 우리들의 숙소인 세레나호텔을 전격 방문한 점이다. 한국대사는 5월 2일이 빈 라덴 사망 1주기라 과격테러 위험의 정보가 있으니 앞으로 남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하는 것이었다. 나와 우리 일행은 이슬람국가인 파키스탄이 탈레반의 돌발테러로 여행제한지역이며 더구나 아프가니스탄과 접경해 있어 어느 정도의 각오는 하고 왔다. 하지만 빈 라덴 사망 1주기가 여행기간 중에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우리 일행과 한국대사, 그리고 우리를 초청한 간다라문화예술협회 관계자는 심야에 격론이 벌어졌다. 한국대사는 위험하니 돌아가라, 간다라협회에서는 파키스탄의 군・경이 우리들을 안전하게 경호하고 있으니 돌아가지 말라. 일행의 의견도 양분되었지만 순례단장이신 박희도 회장의 결심에 따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심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박희도 회장은 단장으로서 가자말자 결심을 하는 것 보다는 여러분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하겠으니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남을 사람은 남으라는 것이다. 나는 단장님의 결심에 무조건 따를 생각이었는데 개개인의 의견을 물으니 잠시 망설였지만 여행을 계속 하겠다고 답했다. 일행 중 한 사람만이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한 사람이나마 돌아감으로써 주재국의 외교관으로서 자국민을 염려하여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한 한국대사의 입장을 헤아린 셈이 되었다. 박희도 회장은 이 순간을 떠올리며 육군 대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오랫동안 군생활을 하면서 전략상 중요한 결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여러 민간인의 생사가 달려있는 결심을 혼자서 하는 데에서는 그 일 보다도 훨씬 더 부담이 되고 고독했다. 그래서 개개인의 의견을 듣고 결정에 맡기기로 했다고 술회하셨다. 제1일 (4월 27일, 金) 첫날인 4월 27일 금요일 아침에 태국항공편으로 방콕을 경유하여 파키스탄 라호르에 가기 위하여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였다. 방콕 스바나부미(Suvarnabhumi)공항에 오후3시경(서울보다 2시간 느리다)에 도착 후 라호르(Lahore)행 트랜지트. 공항휴게실에서 박희도 단장의 인사와 참가자들의 간단소개가 있었다. 5시간 정도를 공기가 탁한 실내에서만 빈둥대는 것이 피곤했는지 코와 입술사이 언저리에 물집이 생겼다. 인도 접경지인 라호르 공항에는 현지 가이드와 정부관리가 마중 나와 있었으며 붉은 장미 꽃다발을 모두에게 걸어주는데 아마도 이곳의 풍습인 듯하다. 긴 총을 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전용차량을 타고 숙소인 펄 콘티넨탈호텔에 도착하니 자정이 다 된 것 같다. 제2일 (4월 28일, 土) 파키스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라호르박물관에서 부처님의 고행상(단식하는 불타상, Fasting Buddha)을 볼 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이 좌상은 뼈와 가죽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다. 민희식 교수는 석가모니가 이처럼 고행수도한 결과로서 中道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이 부처님의 고행상은 모나리자상보다 훨씬 더 중요한 데 홍보가 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잘 모른다며 속상해 한다. 우리 일행은 부처님의 고행상 앞에서 애잔한 마음으로 합장하며 반야심경과 삼귀의례 등을 올렸다. 박물관의 불상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데 한 무리의 신문・방송기자들이 들이닥쳤다. 전 수상이며, 파키스탄무슬림연합(PML-Q) 당수인 차우드리 슈자트 후세인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들을 환영한다며, 인터뷰하느라 난리가 났다. 어딜 가나 정치인들이 언론매체를 몰고다니는 것은 똑같은 것 같다. 이 북새통이 신문에 기사로 나왔다. TV와 방송에는 나왔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파키스탄에 해마다 지원을 하고 있는데도 국제회의에서는 한 번도 우리나라의 의견에 찬성을 한 적이 없다는 얘기를 일행 중 어떤 이가 말한다. 파키스탄은 4개의 주로 지방행정이 나눠져 있는데 라호르(Lahore)는 펀잡(Punjab)주의 중심도시며, 파키스탄에서는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파키스탄의 주요도시 2위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펀잡주지사인 코사 라티프(Latif Khosa)의 초청으로 청사를 공식 방문했다. 2층 정도의 건물내외부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통나무를 많이 쓴 오래된 영국풍으로 제법 멋스럽다. 코사 주지사는, 파키스탄에 지진과 홍수가 났을 때 한국에서 도움을 주었다. 따뜻한 우정을 느낀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슬라마바드로 가는 고속도로를 한국의 대우건설이 만들었다. 그리고 LG브랜드가 인기다. 세계평화를 위하여 이곳을 불교메카로 만들려 한다. 그 첫발걸음으로 여러분을 초청한 것이다. 탁실라에 2500년 전에 세워진 세계최초의 대학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 그런 영광을 되찾고 싶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고 신경질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명상을 통해서 안정을 찾을 수 있으며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파키스탄이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라는 내용으로 긴 환영사를 했다. 박희도 단장은, 문명의 발상지인 인더스강과 대승불교의 원류인 간다라지역을 오게 되어 영광이다. 특히 한국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스님의 고향을 방문하게 되어 기쁘다. 한국의 불자들이 많이 와 펀잡주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융숭한 환대에 감사드린다. 라고 화답했다. 우리를 태운 전용버스는 총으로 무장한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라호르의 중심거리를 지나갔다. 차창너머로 사람들과 거리구경을 할 수 있었다. 듣던 대로 여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무장테러세력의 빈번한 공격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는 TV뉴스 장면에서 보던 대로 주택들은 벽돌로 대충 쌓아 비바람만 막은 것 같고 사람들도 눈만 크지 매우 초라하다. 참으로 가난한 나라다. 이것이 바로 불교를 몰아낸 업장이 아닌가. 우리는 간다라문화예술협회 회원의 골프장 하우스에서 점심을 먹고 대우건설이 지었다는 고속도로를 타고 이슬라마바드로 출발했다. 고속도로에 자동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것 같다. 돌・흙구릉에 나무도 별로 없는 황량한 벌판이다.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니 저녁 8시경. 세레나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에서 2박을 한다니 짐을 싸고푸는 수고를 하루는 하지 않아도 된다. 다시 정장으로 갈아입고 협회 회원이라는 어느 재벌이 초대한 이브닝 파티로 갔다. 우리 말고도 다른 외국인들이 많이 왔고(전날 스와트를 다녀온 EU대사들이라고 가이드가 알려줌),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은 파키스탄 여자들을 여기에서 비로소 볼 수가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들은 굉장히 미인이고 매우 화려하다. 이 나라의 상류층 여인들이라고 한다. 주인장의 환영사가 있었으며, EU대사들측 대표와 우리측은 박희도 단장의 화답형식 등으로 진행되었다. 박희도 단장의 즉석 인사말은 짧고 멋졌다. 여기에 모인 파키스탄 사람들은 이슬람국가인 自國이 反서방・反美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같아 보였다. 악사들은 계속 전통악기로 두드리며 흥을 돋구었지만 간다라문화예술협회 총무인 현지 가이드가 그들의 회원들을 간간이 인사시켜주는 바람에 영어가 안되어 답답하고 재미가 없었다. 아! 영어는 이곳에서도 나를 꾸준히 괴롭히는군. 오늘도 중동의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제3일 (4월 29일, 日) 고대도시 탁실라(Taxila). 여기에는 인류최초의 대학인 줄리앙(Jaulian)사원이 있는데 이 불교사원은 古來로 위대한 스승들의 집합소이며 천문학자, 과학자, 의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부처님의 사리가 8군데에 모셔져 있으며, 1980년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탁실라박물관에는 모흐라모라두 대탑에서 출토된 간다라미술의 최고 걸작이라는 좌불상과 주변에서 발굴된 동전, 항아리, 보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근처에서 부처님의 사리(유골)를 모셨던 곳이라 전해진 불탑인 다르마라지카(Dharmarjika) 스투파(Stoopa)에서 우리 일행은 모두들 합장을 하고 탑돌이를 했다. 우리를 따라다니는 기자와 군인・경찰 등 이곳 사람들은 과연 이슬람교도들인지 이상할 정도로 이 불교의식에 관심을 보이며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음에는 탁실라의 도시유적인 비르 마운드(Bhir Mound)와 시르캅(Sirkap)을 보았다. 시르캅은 작은방 정도의 크기로 칸칸이 구획되어 있는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도시유적지에 대한 설명은 간다라불교미술의 전문가인 민희식 교수와 현지 가이드로부터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 도시는 동서양의 문물이 만나는 곳으로 모든 종교가 화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패션화보를 찍으면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멋진 한 폭의 그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슬라마바드로 되돌아오니 저녁때가 다되었다. 숙소인 세레나호텔로 주파키스탄 한국대사가 방문했다. 우리 일행과 대사와 무관, 영사 등이 참석하여 식사를 하는데, 느닷없이 5월 2일이 빈 라덴 사망 1주기라서 알카에다의 테러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위험하다.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대사관 관계자들이 돌아간 후에도 우리들끼리 가자말자의 격한 토론은 이어졌다. 제4일 (4월 30일, 月) 아침7시. 호텔식당에 모여 식사를 겸한 회의가 속개되었다. 한 명만이 서울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남은 일정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우리는 이제 우리나라(백제, 현재 전남 영광 법성포)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마라난타 스님의 고향을 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인더스강이 흐르는 훈드(Hund)의 박물관에는 의상과 아기자기한 악세사리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어떤 방에는 전통악기를 두드리는 악공들이 서너 명 있는데, 우리나라로 말하면 클럽의 인디밴드 정도랄까? 우리들이 들어가니 빠른 템포로 연주를 시작했다. 가이드가 춤추라고 자꾸 독려하니까 여자일행 한 명이 몸의 추임새를 보일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연주하는 사람들과 박물관 직원들한테 미안한지 가이드 본인이 그들의 춤을 한바탕 신나게 췄다. 박물관 앞터에 썰렁하게 알렉산더대왕 기념비가 높이 솟아 있다. 우리들은 점심을 먹기 위하여 훈드 근처의 별장으로 갔다. 이 집의 구조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주로 나와 왠지 낯설지 않았다. 1947년에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기 전에는 여기도 인도였다. 독립 후에 회교국 파키스탄과 힌두교 인도로 나라가 분리된 것이 아닌가. 식사후 농장을 산책하다가 돌로 지은 명상센터가 있어서 들어가 보았는데 돌집이라서 그런지 기분이 바로 차분히 내려앉음을 느낄 수 있었다. 농장 옆으로는 인더스강이 흘렀다. 나는 이 강물로 손을 씻었고 작은 자갈돌 하나를 가져왔다. 우리는 드디어 마라난타 스님의 고향인 초타라호르로 가기 위해 전용버스에 올랐다. 비가 와 약간의 걱정을 했으나 버스에서 내려 마을을 지나 초타라호르로 올라가는데 비가 그쳤다. 잠시 비가 온 뒤라 주변의 풍광은 더 푸르고 깨끗하다. 파키스탄 정부의 고고학국장인 샤나자 박사는 이 지역 출신들이 세계 200여 곳에서 석학으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스님의 생가터만 남아 있는 곳에다 돗자리를 깔고 준비해 간 과일을 차려놨다. 함께 가신 스님이 발원을 하는데 목소리가 메이셨다. 우리들은 일제히 반야심경과 삼귀의를 올렸다. 이곳에서는 불심이 약한 나에게도 약간의 감흥이 일어났다. 대승불교의 발상지인 파키스탄은 중국 한국 일본으로 불교가 쫓겨나 이 땅에는 불교신자가 없는 이슬람교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불교의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주변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신기한 듯이 우리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남자들과 꼬마들이 전부다.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사람들의 행색이 어찌나 남루한지 스님이 얼마간의 달러를 족장에게 전달하고 다음 일정지인 페샤와르로 향했다. 제5일 (5월 1일, 火) 페샤와르박물관에 도착하여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새긴 조각들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우리를 초청한 카이베르파크툰크와(KPK)주의 씨에드 아퀼 샤(Syed Aqil ShaH) 관광・스포츠・청소년부 장관이 나타났다. 우리들은 관람을 멈추고 중앙홀에 마련한 기자회견장으로 갔다. cultural heritage Gandhara 란 글씨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다. 취재기자들도 많이 왔다. 페샤와르에는 풍부한 불교문화유산이 많다. 본인은 가까운 시일내에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 한국에 가면 여행업계 사람들을 만나 파키스탄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을 수 있도록 홍보를 하고 싶다. 파키스탄은 발전된 국가가 아니지 않는가. 가난하다. 간다라 불교성지를 계속 복원 발굴하여 개발하고 있으니 불교신도들이 많이 오셨으면 좋겠다. 라는 내용으로 샤 장관은 환영사를 했다. 박희도 단장은, 남아 있는 일정에 동행을 해준다니 감사하다.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다. 이번 우리들의 방문계기로 양국 민간단체와의 관계가 발전되기를 바라며 장관의 건강을 빈다, 라고 답사했다. 장관은 페샤와르박물관에 소장된 菩薩頭像(보살두상)을 석고로 축소해 제작한 기념품을 일일이 나눠주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모두는 다음 행선지인 탁티히바히로 가기 위해 부지런히 차에 올랐다. 장관 일행과 기자들도 우리와 함께 간다. 아마도 신문과 TV 방송에 이 기사가 나왔을 것 같다. 1시간 30분 후에 찾아온 곳은 탁티히바히 사원이다. 불교수도원인데 마치 영화에서 본 중세의 가톨릭 수도원처럼 보였다. 가이드가 예수의 제자인 토마스도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설명했으며, 우주적인 기가 충만한 이곳만 제대로 복원한다면 파키스탄은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 일행은 장엄하지만 미처 복원이 안 되어서 방치되어 버려진 것 같은 사원유적지를 바라보며 육법공양 행사를 치렀다. 신문기자들은 이 행사를 찍어대느라 정신이 없다. 장관은 틈틈이 말했다. 복원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너무나 중요한 사원이기 때문에 예산과 기술력이 부족하다. 미국이나 서방에서 지원을 받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전문인력이나 재정적인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중에 있다’는 영어푯말이 군데군데 보인다. 탁티히바히 사원에서 내려와 정원에서 점심을 먹고 마지막 여행지인 스와트(Swat)로 향했다. 내일이 빈 라덴 사망 1주기이다. 정부에서 군・경의 경호를 대폭 강화했다고는 하지만 스와트는 워낙 탈레반의 공격이 심한 곳이니 가지 말자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솔솔 나와 가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다행이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아름답고 트레킹하기 좋은 곳이라는데 빠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를 태운 버스는 실크로드가 보이는 말라가트령(마치 대관령 같은)을 달리기 시작했다. 오고가는 자동차도 제법 많다. 트럭은 전부 무슨 꽃상여처럼 울긋불긋하다. 가이드가 트럭이 주거역할까지 하기 때문에 그렇게 치장을 한다고. 한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너머로 보이는 스와트는 다른 도시보다 거리에 사람들도 많았고 활기찬 모습들이다. 언덕에 층층이 있는 집들은 지붕이 없다. 신문화보를 통해 본 이란의 산골마을과 똑같다. 기름진 농토에 곡식들이 잘 자라고 있으며 상점에 물건도 많아 풍요로워 보인다. 대학교도 보이고 은행도 보인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 중간에 싱가다르 스투파에서 내려 활안스님의 발원에 반야심경 삼귀의례를 하고 탑돌이를 했다. 이 탑은 밑 부분이 허물어져 훼손이 심하다. 이탈리아에서 고고학자들이 1955년 이후 간다라 불교유적복원을 위해 지원되고 있다고 한다. 가톨릭 국가가 불교유적발굴을 위해 지원하는데 대승불교국가인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지 부끄러웠다. 저녁에 세레나호텔에 도착했는데 정문에 바리케이트가 겹겹이 쳐 있어서 다시 긴장이 되고 놀랐다. 지역의 사령관이라는 군인과 경찰간부・시장이 나와서 우리를 반겼다. 이들과 계속 따라온 샤 장관은 우리들에게 선물을 주고 취재진들은 사진을 찍느라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마치 그들에게 對外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홍보물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서도 물론 우리는 준비해간 청자를 선사했다. 제6일 (5월 2일, 水) 마지막 여행지인 스와트의 아침. 눈이 부시게 푸르고 청명한 날씨다. 우리는 줄줄이 무장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마을길을 따라서 불교유적지인 붓카라(Butkara1)로 향했다. 이 스투파 역시 거의 부서져 희미한 흔적들만 남아 있다. 우리는 절을 했고 활안스님은 발원을 하면서 울먹이셨다. 스님은 간다라의 불교성지를 다니면서 부처님의 고행을 생각하니 불제자로서 참회의 눈물이 흐른 것 같다. 이 모습은 본 호위병들은 여기가 그렇게 중요한 곳이냐? 마음의 치유가 되느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많이들 와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며 놀라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붓카라에서 마을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주변 분위기가 살벌하다 했더니 여기에서 일정을 멈춘다는 것이다. 자하나바드(Jahanabad) 마애불을 꼭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뒤로 하고 우리들은 서둘러 스와트를 떠났다. 다시 전용버스를 타고 이슬라마바드로 향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창밖의 경치를 감상했다. 저 멀리 설산인 하얀 만년설이 보인다. 그리고 빈번한 무장세력의 테러 때문인지 아니면 이 나라국민의 취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건물은 다 부서진 채로 대충 비바람만 막을 정도의 주택에서 생활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중간에 샤 장관 가문의 저택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하고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니 오후3시경이다. 스와트에서 일찍 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버스로 시티투어를 다녔다. 이슬라마바드는 구획을 계획해서 세운 도시라며 가이드가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어서 고마웠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부호가 지원하여 건설하였다는 하늘로 치솟는 뽀족한 탑과 웅장한 규모의 이슬람모스크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삼삼오오 짝을 지어다니며 쇼핑도 하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나의 쇼핑은 언제나 그렇듯이 그 나라색이 물씬 묻어 있는 소품들을 몇 가지 구입하고는 주로 아이쇼핑을 했다. 시내와 가까이 있는 지나(Jinah)공원으로 갔더니 외국인들도 보이고 현지인들도 제법 멋쟁이가 많다. 이 공원에는 이슬라마바드공항이 있으며 공식일정으로는 마지막 만찬을 할 디바(Diva)식당이 있는 곳이다. 이 식당의 주인은 예비역 육군소장으로 전 무샤라프 대통령의 친구이며 그의 아들과 이 식당을 운영한다고 한다. 우리들은 공원안의 우아하고 멋진 노천에서 즐겁게 식사를 했다. 파키스탄이여 안녕! 제7일 (5월 3일, 木) 방콕과 홍콩을 경유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저녁 8시경이다. 공항에서 간다라 불교성지순례단 해체식을 간단히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에필로그 이번 파키스탄 여행은 2년 전에 기획된 것이나 그동안 파키스탄에서 테러가 자주 일어나 연기되어 이제야 갈 수가 있었다. 파키스탄에 간다고 하니까 그 위험한 곳엘 왜 가느냐며 사람들이 걱정을 했지만 나는 무사히 잘 다녀왔고 다녀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여행의 목적은 대승불교(한국불교)의 원류인 간다라지역의 불교성지를 순례하며 佛心도 키우고 세계평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이슬람국가를 방문하여 견문을 넓히는 것이지만 솔직히 나는 그저 여행이 좋아서 따라간 것이라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도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기회였던 것 같다. 파키스탄 정부 고위관계자들과의 회동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간다라의 불교유적지를 발굴 복원하는데 우리가 지원해 주기를 원했다. 불교유적들을 잘 복원해 놓으면 관광객도 많이 몰려오고 그러면 파키스탄도 잘 살게 될 것이라며.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간다라의 불교유적 복원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라도 신변안전만 보장이 된다면 세계의 불교신자들은 앞 다퉈 몰려들 것이다. 유적지를 아무리 보기 좋게 꾸며놓아도 탈레반과 알 카에다의 무장세력이 언제 테러를 가할지 모르는 이 위험한 곳에 누가 오겠는가. (<대불총회보> 편집자) 최종수정 2012.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