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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 우리의 적

1973년, 월남은 월맹이 제안한 평화협정에 속아넘어갔습니다.

 
▲ 백선엽 장군이 발행한 귀순증명서. 지리산 지구 빨치산 토벌 작전 당시의 귀순증입니다. 
[평화]라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악용하여 간첩 등의 내적들이 [평화공세]를 취합니다. [평화]는 공산화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좌익들의 위장 용어입니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에 의해 망한 사례가 많습니다.

(사례1)

2차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히틀러는 세계를 속였습니다. 그는 앉으나 서나 평화를 외쳤습니다. 특히 영국 수상 쳄벌린은 그의 말을 100% 믿고 체코의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양보한 후 “이제 우리는 확실한 평화를 얻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마치 김대중이 국민 몰래 비자금을 적장에게 바치고 돌아와(2000년 6월 15일) 국민을 향해 이제는 전쟁이 없다고 선포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세계인들은 입만 열면 [평화]를 외치는 히틀러의 입만 쳐다보다가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사례2)

서기 1125년, 중국 북방의 金나라 태종이 宋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송나라 결사대가 수도방위에 간신히 성공하자 금 태종이 송나라에 [평화]를 제안했습니다. 송나라 평화주의자들(pacifists)이 평화에 대한 여론몰이를 했습니다. 송나라는 금태종에게 황금 500만량, 백은5천만량, 비단 100만량, 우마 1만 마리를 바치고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금태종이 철수하자 송나라에는 평화주의자들이 득세했습니다. 2년 후인 1127년에 금태종은 태평세월을 구가하던 송나라를 침범하여 왕을 죽이고 송나라 백성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사례3)

오사카성의 성주 히데요리가 덕천가강의 [평화] 제의에 속아 3족이 멸망당했습니다. 오사까 성은 3겹의 수로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덕천가강이 히데요리에게 [평화]를 제의했습니다. "이제는 평화롭게 삽시다", "평화의 상징으로 우리 수로부터 메웁시다". 이데요리가 이에 속았습니다. 밤을 새워 수로를 메우자마자 새벽에 오사까 성이 점령됐습니다. 덕천가강은 히데요리 가족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멸시하는 말을 했습니다. "적장의 말을 믿는 바보는 죽어야 한다"고.

(사례4)

1973년, 월남은 월맹이 제안한 "평화협정"에 속아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미군이 철수했습니다. 미군이 나가자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순식간에 점령됐습니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다해서 흑진주라는 별명을 가진 사이공, 제2의 파리고 불리던 사이공 항구도시가 야만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치품들이 있던 자리에 피와 파편이 즐비했습니다. 총 끝 앞에서 목숨을 구하는 자들의 아우성이 타이타닉호의 최후처럼 처절했습니다.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국민이 당하는 최후였습니다. 하늘이 스스로 돕지 않는 자를 외면한 것입니다.

간첩이 많았습니다. 간첩들은 [민족주의자]와 [평화주의자]로 위장했습니다.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천만여 민족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죽고, 갇히고, 신음하고, 도망한 이후에야 알려졌습니다.

1967년 9월 3일, 월남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패망 후에야 알려졌습니다.

그 간첩이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그의 이 말이 미국에 반전 여론을 자극했습니다.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평화회담을 했습니다. 월남사회는 남남분단으로 치달았습니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표방하며 파리 평화회담에 반대했고, 야당은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며 악착같이 데모를 주동했습니다.

월맹은 한쪽에선 평화회담으로, 다른 쪽에서는 대남공작으로 집요하게 공산화 전략을 추구했습니다. 1973년 1월 27일, 드디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를 주고 평화협정서라는종이조각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건 거짓 문서였습니다.

키신저는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었습니다. 캐나다 이란 헝가리 폴란드, 4개국이 250명의 휴전감시위원단을 만들어 휴전선을 감시했습니다. 월맹의 외무차관급이 이끄는 150명의 고문단을 사이공에 인질로 받아 놓았습니다.

이것도 믿지 못해 미국은 영국 소련 프랑스 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습니다. 월남과는 방위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미군이 보유하던 각종 최신 무기를 모두 월남에 주었습니다. 월남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이로써 세계의 공기는 전쟁에서 평화로 옮겨갔습니다.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습니다.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세계는 이를 "동양적 겸양의 표시"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더욱 신뢰했습니다.

모두가 환상이었습니다. 환상으로 인해 쥐가 고양이를 잡아먹는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월맹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전쟁수행 능력을 상실할 대로 상실해 있었습니다.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월남은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속임수에 망하고, 간첩들에 망하고, 극성맞은 데모에 망하고, 부정 부패에 망했습니다.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에는 수많은 땅굴이 있었고, 그 땅굴 속에는 혁명정부 청사까지 들어서 있었습니다. 월남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내용이 단 하루만에 여기에 보고됐습니다. 티우가 공산 프락치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비서실에도 첩자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모범적인 성장(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홤녹따오를 위시하여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간첩이었습니다. 이는 망한 다음에야 드러난 사실들입니다. 정보기관에 가장 많은 간첩이 들어 차 있었습니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습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월맹 경제 원조를 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오랜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평화무드에 들떠 있었습니다.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됐습니다.

1975년 9월에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 갈등을 유감없이 연출했습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 혼란과 어우러졌습니다. 국민의 사기가 떨어지고 계층 간 갈등이 증폭됐습니다. 좌익들의 활동공간이 점점 더 넓어진 것입니다.

티우 대통령은 강력한 방공주의자였는데도 월남은 망했습니다.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했으며, 속옷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발에다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전투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무장한 월남군대를 붕괴시킨 것입니다.

좌익이 시민종교단체를 장악했습니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구국 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습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여 반부패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켰습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7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습니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습니다. 월남은 군사력으로 망한 게 아니라 이들 좌익 단체의 선전-선동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입니다.

암살과 각종의 압력들이 사회적 공포감을 확산시켰습니다.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 언론인들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되고 그들의 친척들이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이 침묵했습니다.

1974년 10월, 유전이 발견되었습니다.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해지고 안일해 졌습니다. 티우 대통령까지도 58만이라는 막강한 군사력에 도취돼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1975년 1월 8일, 드디어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됐습니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으로 달렸습니다.

부패했던 군인들이 앞을 다투며 가족을 데리고 배와 비행기로 탈출했습니다. 남침 후 한 달이 지났지만 미국은 방위공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탱크부대가 독립궁을 점령했습니다. 5명의 월남 장군들이 자결하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 경찰은 수용소에 연행됐습니다. 공무원,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은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습니다. 월남군 부대 시설을 개조한 것입니다. 한번 가면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은 예외 없이 모조리 처형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층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습니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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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명상의 마을 플럼빌리지를 설립-운영하고 있는 틱낫한 스님도 월남에서 [평화]를 외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한국을 방문한다 합니다. 월남에서 그가 외친 [평화]는 수많은 월남 국민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로 도망가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평화]주의자를 경멸해야 합니다. 일반 국민이 알고 있는 평화와 간첩이 알고 있는 평화는 정 반대의 개념입니다.

지금 우리가 한국에서 듣고 있는 [평화]는 좌익들의 위장용어입니다.

2009.3.5. 지만원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