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6일 쿠키뉴스에 의하면 전사모에서 ‘5·18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이에 대해 5.18단체 측으로부터 집중된 비난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전사모 관계자는 “‘5·18특별법’으로 인해 헌법상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침해받았다”며 “현재 제출시기와 방법을 놓고 검토중이다”고 밝혔다 한다. 전사모는 헌법소원의 근거로 북한 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5·18 배후설’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5·18관련단체들은 이를 반역사적 행태에 대응할 가치조차 없다는 입장을 표한 모양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전사모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다. 하나는 헌법소원의 컨텐츠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컨텐츠이 부실하면 자칫 다음에 "보다 훌륭한 컨텐츠"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전사모가 소진해버린다는 것이고, 설사 컨텐츠가 훌륭하다 해도 지금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노무현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 많아 공연히 귀중한 기회만 없애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5.18 특별법에 대한 필자의 연구를 보탠다.
5.18특별법 제정
95년12월3일, 마녀사냥의 광란 속에 전두환이 뭇 언론들로부터 온갖 경멸과 저주를 받으며 비참한 모습으로 안양 교도소에 끌려갔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을 어떻게 저렇듯 함부로 끌어갈 수 있을까 할 만큼 한국사회는 인격이 실종된 채 광란적 인민재판의 무대가 되었다. 12월6일, 민자당이 앞장서서 당무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5.18특별법제정기초위원회 의장인 현경대 사회로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안“이 최종 확정했다. 민자당은 여기에서 ”헌정질서파괴범죄“를 형법상의 내란. 외환의 죄(제1편 1,2장)와 군형법상의 반란. 이적의 죄(제2편 1,2장)로 규정하고 앞으로 이들 범죄를 행한 자에게는 대통령 재직기간 중 공소시효를 정지하기로 했다.
특히 12.12와 5.17, 5.18등과 관련, “79년12월12일부터 93년2월24일까지(6공의 종결 시점)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는 내용을 부칙에 경과규정으로 명시하여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내란죄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민자당이 마련한 특별법에 따르면 전.노씨에 대한 공소시효는 13년3개월이 배제된 2009년이 되었다. 상식논리대로라면 특별법은 명백한 위헌이었던 것이다.
본문에는 “대통령 재임기간 중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적극 모의에 가담한 공범에게도 적용하는 것이 포함돼 있었다. 이는 전-노씨 이외에 핵심관련자들에 대해서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다만 부화뇌동하거나 단순히 추종한 자들(형법제87조3호와 군형법 제5조3호)에게는 특례규정의 적용을 배제토록 했다.
민자당은 이와 함께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경우에도 고소-고발인이 검찰의 수사결과와 불기소 방침에 불복할 때 관할법원이 변호사를 지정, 수사 및 기소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재정신청제도를 특별법안에 도입했다.
전두환과 그 추종자들을 틀림없이 옭아 넣기 위해서는 헌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예외 법’이 필요했고, 이것이 바로 ‘5.18특별법’이었던 것이다.
민자당은 헌정질서파괴범죄에 저항하여 그로 인해 유죄선고를 받은 피해자들에게 재심청구의 특례를 부여했다. 이는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등의 실질적인 명예회복의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95년12월19일, 국회는 장래의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없이 언제나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포함하는 ‘5·18.특별법’을 통과시켰고, 이는 12월20일부터 시행토록 했다.
특별법에 대한 위헌성
검찰은 누구부터 손을 댔을까? 훈장의 격이 높은 순위부터 소환-구속하려 했다. “개국공신”들에게 주었던 훈장의 격이 높은 사람들이 검찰 살생부의 1순위였던 것이다. 광주의 악질로 통한 최세창, 전두환의 분신 장세동이 제1차로 지목됐다. 96년1월17일 오후2시, 검찰은 12.12 및 518 관련자로 최세창과 장세동을 포함한 5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에 전두환 측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상석 변호인이 영장실질심의에서 법원에 5·18특별법에 대한 위헌제청을 신청한 것이다. “5·18특별법”이 제정 된지 1개월여 만에 위헌시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법원 측은 위헌제청신청서가 접수된 지 4시간여 만에 위헌신청사건을 영장담당판사인 형사합의21부 김문관 판사에게 배당하여, 영장심사와 함께 위헌여부도 판단토록 했다. 이에 판사는 우선 이 두 사람에 대한 영장심사를 보류했다. 1월18일, 김문관 판사는 5·18특별법의 “공소시효 정지조항”이 위헌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12·12사건의 군 형법상 반란죄부분은 공소시효(15년)가 이미 끝난 만큼 특별법의 공소시효 정지조항을 적용, 처벌하는 것은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는 것이 제청의 사유였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김판사는 12·12관련 피고소-고발인 38명중 5·18사건과 중복 관련된 13명을 제외한 25명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 사법처리를 보류키로 했다. 그러나 이학봉과 황영시 유학성은 그날로 구속수감 했다. 서울지법은 1월 18일 오후 김판사의 위헌심판제청서를 대법원을 통해 우편으로 헌법재판소에 보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5.18” 위헌심판제청서를 받은 헌재의 고민은 이렇게 표현됐다. 정동년 등이 낸 헌법소원을 미봉하려다가 취하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은 헌재가 이번에는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를 떠안게 된 것이다. 이는 95년1월, 정승화가 낸 헌법소원 사건이나 95년12월 정동년 등이 낸 헌법소원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까다로운 것이었다. 원칙대로 한다면 까다로울 것이 없고,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논리를 꿰맞추어 시국 정서에 영합하려 하니 어렵고 복잡했던 것이다.
헌재가 5.18특별법을 합헌이라고 결정하면 헌재는 소급입법을 인정해야만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소급입법은 위헌이라는 게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헌재는 이전에 12.12와 5.18모두 공소시효가 지난 것으로 판단했다. 공소시효가 끝났음에도 소급해서 시효를 연장하는 특별법은 명백한 위헌이다. 그런데 헌재가 대통령에 뜻에 따르려면 이를 뒤집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일간지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법률적으로는 위헌결정을 내려야 옳았다. 하지만 문제는 헌재가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데 있다. ‘특별법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릴 경우 특별법을 제정한 세력에게 정치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은 물론 이미 구속 기소된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 12.12 군사반란 관계자에 대한 사법처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게 되고, 이미 기소된 사람은 공소를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을 지낸 전-노씨는 군사반란으로 처벌할 수 있지만 다른 관련자들은 5.18특별법에 의해 처벌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헌재는 ‘역사바로세우기’ 대세를 거슬렀다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헌재가 고민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쿠데타적 사건”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면서 불법성을 지적하고도 “역사에 맡긴다”고 선언한 부분이었다. 검찰은 군주의 이 지엄한 발언에 충실해 “기소유예” “공소권 없음”이라는 고육지책의 처분을 내렸고, 헌재도 정치적인 상황에 얼추 맞춰 결정을 내려왔다. 애초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져 일이 이처럼 복잡하게 됐다는 것이 당시 헌재 관계자들의 말이었다.
4차례의 평의를 거치는 동안 ‘소급입법’에 대한 합헌론과 위헌론이 갈려 격론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위헌론을 펴는 재판관과 입씨름을 하던 정당 추천을 받은 일부 재판관이 회의실에서 뛰쳐나오는 일도 있었다. 4차 평의를 전후해서 재판관들은 퇴근 후 집으로 전화를 하면서까지 의견조정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 때 위헌론이 우세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법조계와 검찰 주변에서는 헌재의 결정이 임박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대통령의 해외순방 출국일인 1월 24일 이전에 헌재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며 조기선고를 서둘렀다.
95년1월15일에도 헌재 주변에서는 “이견이 있어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날 오후 소장은 대법원 추천의 재판관 등 일부 재판관을 소장실로 불러 장시간 의견조정을 했다. 재판관들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위헌론을 주장하는 재판관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다는 소문도 퍼졌다.
1월16일, 헌재는 전격적인 선고를 했다. 이는 ‘작전’으로 불렸다. 헌재는 1월15일 5차 평의에서 잠정결론을 내리고 1월16일 선고 방침을 정했으나 선고기일을 공개하지 않았다. 관계자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결정문 정리 작업에 몰두했다. 오후 5시쯤 퇴근시간 전 재판관실 등 결정 선고 관련 부서에 1월16일 오전 조기출근지시가 내려졌다. 1월16일 헌재는 오전8시30분 마지막 재판관 평의를 열었다. 이때까지도 이날 선고를 하게 될지가 알려지지 않았다.
평의가 끝난 오전 10시10분쯤 헌재는 1월16일 오후 2시에 선고공판을 연다고 발표했다. 결정의 당사자인 장세동 등 5명과 검찰, 법원에 선고사실을 통보했다. 일주일 전에 당사자에게 선고날짜를 통보하던 관례를 깨고 선고 4시간 전에야 통보를 한 것이다.
헌재의 이 같은 전격 선고는 선고내용이 다른 기관이나 언론에 흘러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정치권이 이 결정내용을 참작하여 특별법을 제정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날 평의가 끝났음에도 다음날 오전 평의를 한차례 더 한 것도 보안용 작전이었다.
“5.18 특별법은 합헌 결정” 1월16일오후 2시, 5.18 특별법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졌다.
"이 법조항은 우리 헌정 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힌 헌정질서 파괴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집권과정상의 부도덕성이나 그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의 완성여부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다른 헌정질서 파괴행위와 이 사건을 구분해 취급한 것은 충분히 수긍할 합리적 이유가 있다".
12.12 및 5.18사건은 다른 정권탈취 행위와는 특별히 구분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을 내놓은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예외규정이었던 것이다. 검찰뿐만 아니라 헌재까지도 권력의 시녀였던 것이다.
이 결정으로 5.18특별법의 위헌 논쟁은 일단락 됐으며 12.12사건과 관련, 구속영장이 청구됐다가 보류된 장세동, 최세창에 대한 영장이 재 발부 되고 검찰의 수사가 급물살을 타게 됐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내용은 "과거 청산이라는 국민적 당위성 등 입법 정당화를 위한 공익이 개별 사건에 내재된 일부 불평등 이유를 충분히 배제할 합리적인 이유라고 판단되기 때문에 이 법률 조항은 합헌이다“라는 대목이다. 과거청산이라는 대세 앞에 소수가 당하는 불평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은 대세만 보호하고 소수는 짓밟을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인민재판법인 것이다.
이런 이상한 논리에 찬성한 사람은 4명, 반대한 사람은 5명이었다. 9명중 5명이 ‘5.18특별법은 위헌’이라는 의견을 낸 것이다. 퇴근 후에 전화를 걸어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재판관들을 소장실로 불러 의견을 조율하고, 격론 끝에 퇴장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9명 중 5명이 ‘위헌’의견을 낸 것은 사실상 특별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이나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라면 5대 4이면 위헌 판결인 것이다.◇
지만원 박사(시스템클럽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