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2008년 2월 18일 대불총 사이트에 게재하였던 원고를 다시게재한다
당시 10만원 지폐에 김구선생 초상화 선택이 적합한가에 대한 판단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 이였다
이 내용은 일본 월간지 "세계"에 게재되었던 김일성과의 대담중 김구 선생이야기와
김구선생이 북한 방문후 당시 중국(장개석 본토 장악시) 한국공사(유어만)가
김구를 방문하여 대담한 내용이다.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에는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시 게재한다.
-편집자-
대한민국의 노무현 정부는 임기종료를 2개월 정도 남겨둔
2007년 12월에 신규로 발행하는 10만 원 권의 초상을
김구 선생으로 선정하고, 2009년에 발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물론 국민들의 여론조사에는
박정희 前 대통령과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1, 2위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과 달리 왜
김구 선생을 서둘러 선정하였을까?
과연 김구 선생이 적격자인가? 에 대하여
대한민국 국민이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실마리가 있기에 두 가지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일본 월간지 <世界> 8월호<김일성과 대담 내용 중 김구선생 관련 부분>
먼저 1985년 일본 월간지 <世界> 8월호에 “해방40년을 맞이하여”란 제목으로
동 잡지사의 편집부 안강량개(安江良介/야스에료스께)씨가
김일성을 만나 1985년 6월 9일 대담한 내용 중 김구 선생에 대한
김일성의 인터뷰 내용(pp.194~195)을 그대로 번역 전재한다.
김구는 유년 시대 부터 황해도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해방 전 “상해임시정부”에 있으면서 다수의 공산주의자를 살해한 유명한 반공(反共)분자였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김구라면 이를 갈 정도였다.
해방 후 남조선으로 돌아온 김구는 자신의 비서를 통해 나에게 만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김구 비서에게 그와 만나는 것을 환영한다는 뜻을 전하였다.
김구는 나를 만나기 위하여
북조선에 오기 전에 재차 자기 비서를 보내와 과거의 자기 죄과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물어왔다.
그리하여 나는 과거의 일은 모두 백지로 돌리자고 하였다.
이리하여 김구는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북조선에 들어와 우리들이 소집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는 이승만계의 정당을 제외한 남조선의 대부분의 모든 정당, 대중단체의 대표가 참가하였다.
그때, 나는 김구와 수차례 만나 담합하였다.
그는 나에게 과거에 자신들이 중국의 상해에서 공론(空論)으로 밤낮을 보내고 있을 때
장군은 무기를 손에 들고 싸웠으며, 승리하여 나라의 독립을 찾았다.
자신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반대하였지만 용서하여 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그는 북조선의 공산주의자는 이전에 자기가 보아온 공산주의자와는 다르다.
당신 같은 공산주의자라면 손을 맞잡고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함께 싸울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김구는 남북연석회의에서도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김구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고 남조선으로 돌아갈 무렵,
자신은 북조선에 체류하고 싶지만 오래있으면 북조선에서 자신을 억류하였다라고
반동분자들이 데모를 확대할 두려움이 있으니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남조선으로 돌아가 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싸울 작정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몇 가지 부탁이 있노라고 말하고,
남조선에 돌아가 투쟁을 일으켜 아무리 해도 활동을 못하게 되면 다시 올 생각이니
여생을 보낼 수 있게 과수원이나 하나 주기 바란다.
그는 또한 나이는 먹었으나 공부는 하고 싶으니 용지와 붓을 선물로 가지고 싶다고 했고,
남조선의 황해도 연백평야(38도선 이남)의 농민을 위해 관개용수의 공급을 재개해 주시기 바란다는 뜻을 제기하였다.
나는 그의 요구를 전부 해결하여 줄 것을 약속하였다.
나는 그에게 남조선으로 돌아가 싸우다 다시 북조선으로 온다면
과수원 농사라도하며 여생을 편히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
그리고 공부한다는 것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양심적으로 일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용지와 붓을 증정한다. 또한 연백평야 농민의 요구인 관개용수도 다시 공급하는 것으로 하겠다, 라고 말하였다.
김구는 남조선으로 돌아가 얼마 안되어 암살되었다.
미국 제국주의자와 그의 앞잡이가 자기들에게 따르지 않는다고 그를 살해한 것 같다.
2. 당시 중국(장개석 총통 본토 장악) 주한공사 유어만 공사와 김구 선생 대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3개월 뒤인
1948년 7월 11일 중국 장개석 총통이 파견한 주한국공사이며
유엔 한국위원단원으로도 활동한 유어만 공사가
김구선생을 방문하여 약 1시간 정도 대담한 내용(영문, 유엔자료)을 번역 공개한다.
유: 저는 무엇보다도 김구 선생님을 정직한 분으로서 존경하여 왔습니다.
저는 외교관이기는 하지만 직설적인 대화를 즐겨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혹시 공격적인 대화를 하더라도 정직한 사람간의 대화를 하고 싶어 찾아뵌 것이라고 이해하여 주십시오.
김구 : (고개를 끄덕임)
유 : 제가 부임 후 제일 먼저 김구선생님을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아드님과 며느리께서 아직 중국에 계시기 때문에 통역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주 찾아뵙고 싶어도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김 : 아들과 며느리가 나와 함께 있지는 않지만 통역해 줄 다른 사람이 있으니 걱정마시오.
유 : 오성철씨가 선생님께 쓴 편지가 있는데 공사관에 두고 왔습니다, 나중에 전해 드리겠습니다.
왕씨에걸 중국 외교부장도 곧 편지를 보내시겠다고 했습니다.
장개석 총통께서도 편지를 쓰시겠다고 하셨지만
외교부장이 오늘 제가 선생님을 만나 뵌 후 그 결과를 보고받고 쓰시라고 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알기로는 3통의 편지는 모두 이승만 박사께 협조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저희는 이승만 박사와 선생님과 김규식 박사 세 분이 한마음이 되어
남한정부수립을 추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중국격언에 “형제들이 집안에서는 서로 싸울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모욕적 행동을 해오면 이를 단결하여 용서하지 않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세 분간에 의견차가 있다 하더라도 세계 공산주의를 주도하고 있는 소련의 위협에 처한 지금,
세 분은 형제간 이십니다.
저는 선생님의 아드님인 김신씨를 형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말씀드린 말이 좀 거슬리시더라도 아들이 진심에서 말씀 드리는 것으로 받아 주십시오.
만약 선생님께서 아니시기를 바라지만 공산주의를 믿고 가입하셨다면 말씀하여 주십시오.
그러시다면 저희는 서로 정치적으로 적대관계가 되고 다시는 만나지 않겠습니다.
김 : (근엄한 웃을 지으며)
나는 항상 닥쳐올 일을 알고 있고 지금
나는 가장 가까운 동지들에게도 말 못할 것을 마음에 갖고 있고,
당신에게도 말 할 수 없소, 이 정도만 말합시다.
즉 멀지않은 장래에 내 동료나 당신들이 좋아하건 안하건 모든 것을 분명히 하겠소.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유 : 마음속에 갖고 계신 것을 지금 말씀해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당장은 말씀 안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마지막 결심을 하시기전에 혹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제 개인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김 : (탐탁치 않지만 묵인하는 표정을 보이고 있음)
유 :
제가 이승만 박사께 김구 선생과 협력할 용의가 있으신지 여쭤볼 때 마다,
이 박사께서는 항상 “김구선생이 나와 함께 일을 할 의향이 있다면 내가 그를 즉시 찾아보겠소”라고 말씀 하십니다.
저는 이 박사께서 김 선생님께 부통령직을 제의할 것이라는 인상을 항상 받곤 했습니다.
물론 김 선생님께서는 부통령직 제의 자체를 편치 않게 생각하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구성중인 정부의 부통령직을 맡으신다면 이 박사와 협력하시겠다는 것으로서
국민들과 난처해하고 있는 김구 선생님의 추종자들에게 우익의 단결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오랜 기간 애국적인 독립운동을 해오신 영광스런 자취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평양에서 열렸던 소위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다녀오신 일로
명성에 크게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과거 중국북부에서 공산당원에게 포로로 잡힌 한국민들은 죽음의 위협하에서도
“우리는 김구 선생의 부하들이다.
우리는 공산당에게 절대 협력하지 않는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하신 일은 김구 선생님을 따르는 모든 동지들에게 큰 비탄을 안겨주신 것입니다.
김:
그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소. 북한공산당원들은 나를 협력자로 대우하고 있소.
아까 얘기한 대로 곧 내 입장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이요.
그렇다고해서 내가 남한정부에 참여하겠다는 말은 아니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이 박사는 한민당에 사로잡혀 있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밖에 할수 없소.
내가 정부에 참여하면 좁혀질 수 없는 의견차이로 문제점만 생길거요.
차라리 안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이요. 나는 지저분한 정치싸움판은 딱 질색이요.
유:
그런 말씀이시라면 더욱 정부에 참여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 박사님 휘하에는 신익희, 이청천, 이범석과 같은 김구 선생의 오랜 동지들이 있습니다.
김 선생께서 참여하셔서 이 분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야만 한민당이 마음대로 못하게 될 것 아닙니까.
이 박사님도 나라를 위해 필요시 혼자 힘만으로는 한민당을 제어하기 힘들지 않으시겠습니까.
김 선생님이 정부에 참여하셔서 한민당을 견제하시는 것이 이 박사님을 도우는 것이 될 것입니다.
김 선생님이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의 운명을 한민당의 손에 맡겨두는 격이 되는 것 아닙니까?
김: (정치싸움판에 끼여들기 싫다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더군다나 내가 우리나라에 긍정적으로 도움이 될 이웃나라는 미국과 중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어떤 정당의 인신공격으로 내가 세상천지에 반미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있소.
우리는 우리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가 필요한데,
내가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미국과의 불화로 국가이익에 해가 될 것 같소.
유: 그렇지 않습니다.
이 박사께서도 한 때 반미주의자로 모략을 당한 바 있었습니다.
지금은 해명이 돼서 미국이 이 박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결국 한국인들의 문제입니다.
하지장군도 아마 미국에 소환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단합하고 유엔이 전적으로 지원하면 잘되지 않겠습니까.
김: 당신은 남한정부를 중국이 제일 먼저 승인할 것으로 보십니까?
유:
제가 그것을 확인할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중국 미국 그리고 영국이 거의 동시에 가장 먼저 승인을 할 것으로 봅니다.
김: 미국이 승인을 거부할 가능성은 어떻게 생각하오.
유: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미국국민은 한국의 독립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김:
내가 북한의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참가하게 된 동기는
북한의 실제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소.
앞으로 3년간 북한이 북한군의 증강을 중지하고,
한국이 아무리 애를 써서 국군을 키운다해도 현재의 북한군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오.
소련은 한국정부가 수립된다면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도 수월하게 남쪽을 급습할 것이고,
남쪽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요.(주1
유:
소련은 전쟁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과거 소련은 국제적 압력 때문에 두 번, 한번은 한반도에서 또 한 번은 요동반도에서 물러난 적이 있습니다.
소련은 유엔을 통해 전세계 여론이 들고 일어스면, 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이 정부를 수립하면 북한이 소련의 괴뢰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 협력할 수 없다는 김 선생님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유엔의 지원 하에 정부를 수립하면
그 국가는 주권이 있는 국가가 될 것이며,
다른 한 쪽을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명분이 없는 쪽을 아신다면 어느 쪽에 가담하셔야 할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주) 1. 전쟁 위협에 대한 김구의 견해가 국민에게 발표한 것과
중국공사에게 말한 것은 정반대임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 방 문 후 귀국하여 발표된 1948.5.6 성명 내용 중 :
"외세의 간섭만 없다면 우리도 평화로운 국가생활을 할 것이란 확증을 하였다 "
즉 김구는 북한의 전쟁 위협에 대하여
유어만 공사에거 거짓을 말하였거나
방한방문 후 대국민 성명을 거짓으로 하였다고 평가 할 수 밖에 없다
글 : 사무총장 이석복 예비역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