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면 보아야 할 글]망국 조선을 부활시키려는가?
대한민국, 조선에 침략 당하다
대한민국은 지금 공격 받고있다
역사의 진실 사실도 중요치 않고 관심도 멀어진 속에 망국조선의 유령에 의해서다
한국인의 자유민주 정신이 건국 100년도 안돼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러니 공산당의 중국이
왜 꼭 망해야만 하는지,
망할수 밖에 없는지,
그것도 패권국 미국에 의해 얼마 가지 못하리라는 걸 이나라만 모른다 나라가 나라 아니요
백성이 백성 아니며 임금이 임금 아니었다
조선 망국을 슬퍼함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나라인가 백성인가
아니면 일신의 영화만을 꾀했던 暗主를 위해서 인가'
땅바닥과 구분이 힘든 잿빛 초가지붕 1만개가 마치 공동 묘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다
도로라 할것도 없고 나무들과 정원도 없다
도대체 사람이 살 수 없을것 같은 무너져가는 흙집들, 거리마다 가득한 온갖 쓰레기와 오물 투성이의 한양모습은 충격이었다
거리라고 상점과 상인들은 없다시피 했다
지난 겨울 조선사신단이 중국 황제에게 바칠 공물을 가지고 베이징으로 떠났다
다름아닌 달력을 받기 위해서 였다
달력 확정짓는건 중국황제의 고유 권한으로 수백년전 부터 그렇게 받아 왔다
조선이 중국이 아닌 다른민족을 이웃으로 뒀다면
오늘날 조선은 기본교양과 교육에서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중국에선 옛경전을 연구하고 아는걸 학식의 최고권위로 여기는데 조선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들의 언어와 지리 자연에 대한 지식이 완전히 경시되고 있다
조선의 군주 이희왕(고종)은 중국의 충성스러운 신하다
조선에서 정치와 사회는 분리 될수가 없다
조선에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유일한 계층은 양반이기 때문이다
이나라의 모든 관직은 뇌물을 통해서만 구할수 있고 그것은 양반의 손에만 달려있다
1890년대 까지 2년 또는 3년단위로 팔렸다
하지만 거대하고 강력한 귀족가문 민씨일파가 속해있는 당파가 임기를 1년으로 줄이자
관리들은 1년동안 마쳐야 했고 그렇게 착취는 더 가혹하게 이어졌다
만일 그들이 정말 필요한 생계유지비 보다 더많이 번다면 관리들에게 모두 빼앗길 게 자명해
평소 일할 의욕도 상실한채 누워서 담배를 피거나 멍청히 앉아 있는 것이다
이곳에 만연한 가난과 비참함의 가장 큰 원인 이었다 .
관리들의 탐욕은 소유에 대한 모든 욕구와 노동의지 ,모든 생업 그리고 조선의 전체를 집어 삼켰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일한단 말인가?
지구상에서 조선 만큼 가난하고 불쌍한 반면 지배층이 거짓되고,
범죄적인 곳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 단언한다
( 1894년 오스트리아출신 여행가 헤세 바르텍) ' 정직한 관리란 조선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다
가난한 사람은 가여운 삶을 산다 .
정기적으로 세금내야 할뿐 아니라 관리 밀수꾼 경찰 군인 여기에 겨울과 봄이되면 출몰하는
도적떼에게 돈을 바쳐야 한다.
조선사람들이 게으르다고 하지만
이는 사유재산권이 불안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포자기 현상에 불과하다 .
궁중의 고관들은 보수도 없다 .
그들의 급료는 일본과의 전쟁후 정부에 자원이 없게되었을 때 부터다
오늘날은 매달 콩 몇말밖에 안준다
이것도 현 왕조 초창기 나귀나 말을 먹이라고 각자에게 배당되던 배급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백성을 약탈하고 상상할수 있는 온갖 부정을 저지르는걸 어찌 막겠는가
그런데도 궁중의 높은 벼슬은 누구나 침을 삼킨다. 벼슬하는 사람들은 조금만 재주 부리면 얼마 안있어 실속있는 지방수령 자리를 얻을 가능성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관직이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말은 옛날의 낡은 경전에서나 있는 것이다.
관직은 공공연하게 매매되고 그것을 사는 사람들은 체면을 차릴 생각도 하지않고 들인 비용을 빼내려한다.
관찰사로부터 미관 말직에 이르기까지 벼슬아치는 누구나 조세 와 소송과 그밖의 모든것을 가지고 재주껏 돈을 만든다 . 어사들 까지도 더할수 없이 뻔뻔스럽게 권력을 이용해 먹는다 '
(샤를르 달레윈저 =한국천주교회사)
"조선 관리들은 살아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다.
조선인들은 자기노동으로 획득한 재산을 전혀 보호 받지 못하는 체제서 살아 가고있다.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음식과 옷 주는것 외에
그가 소유한 모든것을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 의해 언젠가는 빼앗기리 라는것을 안다.
한양에는
예술품도 없으며
골동품도 드믈다
보잘것 없는 왕의 거둥이외엔 볼만한 것이 없으며 극장도 없다
다른 나라 도시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없다 .
유서깊은 도시지만
유적도 도서관도
문학도 없으며
최근에는 종교(불교)에 대한 무관심이 어느때 보다도 심해 사원을 남겨 놓지 않았다.
집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겁 날 정도로 비위생적이고 대부분은 더럽고 해충이 득실 거린다.
모든 하수는 길 양 옆으로 파여있는 말할 수 없는 더러운 도랑에 버려진다.
음식 찌꺼기들이 말라 붙어 있거나 악취가 진동한다 옷들은 남루하고
아이들도 어제그제 세수한 얼굴들이 아니다. 나라는 관료주의에 완전 먹혀 버렸다 .
헤아릴수 없이 많은 부정이 저질러 질뿐 아니라
정부 그 자체가
모든 근면과 성실을 죽여버리는 착취,
밑도 끝도 없는 부패의 바다 ,
도둑질을 위한 장치에 불과 하다"
(영국 출신 여행가로 조선을 네차례 방문 왕실접견도 했던 이사벨라 비숍의 저서 '조선과 그의 이웃나라들' )
고종이 친정에 나서면서 처음 한건
대원군 개혁으로 부쉈던 만동묘를 재건,
250년전 죽은 명황제의 유령에 제사지내고
승격했던 군신을 다시 강등 시켰으며
강화도 방어 군사력을 왕실 경호강화로 돌린 것이다.
그리고는 민비와 경쟁적으로 왕실사치를 위해 국고 탕진에 매진 한 것이다 .
순식간에 국고를 탕진, 병사들 급료도 못주는 재정파탄에 정부는 난맥상이다.
조정관료에게 녹봉을 나누어 주는 일과 군사들에게 급료를 여러달 주지못한 상황에 이르러
승정원일기는 이렇게 적었다"
지난번 조사에게 나누어 줄 녹봉과 군사에게 나누어 줄 요(料)가 부족한 원인과 수습방책을 호조와 선혜청 당상 그리고 양향청 당상들이 널리 의논 한 결과 한해의 수입을 통계 해보면 지출과 맞지 않습니다
생각컨대 지금 황급한 사세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나라가 나라구실을 못하고 있으니
國計의 한심함이 어찌하여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입니까? "(고종실록 고종25년 1888.5.2) "
조선의 국고가 비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관리들은 월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자신들의 앞가림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 일단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자신들의 필요가 충족된 다음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
백성들은 억압되고 있습니다
관직은 가장 돈을 많이내는 사람에게 돌아 가고 그사람은 또 곧바로 해임되고 새 구매자를 찾습니다
정부의 고위직이 저지르는 부정과 부패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정부는 빚 갚고 관리들에게 봉급 줄 돈도 없는데도
궁중의 예식들과 불필요한 사치품들에 거금을 탕진 합니다.
불만이 사회에 팽배해 있고 얼마 가지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 날것만 같은 불안감 이 듭니다.
여왕(민비)이 우두머리인 민씨 집안은 왕국의 모든 권력과 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백성들 원한의 대상입니다.
만일 실력을 갖춘 지도자가 나타 난다면 주변을 혁명을 원하는 세력이 곧바로 몰려 들 것입니다.
저는 지금 혁명이 나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 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쁜 정권이 들어 서는것은 불가능 할것 같습니다.
국왕은 친절한 사람이지만 필요한 개혁을 밀어 부칠수 있는 능력이나 용기 힘은 없는 사람입니다 (어거스틴 허드 주한 미공사 1892.11.18)민비의 손바닥 위 꼭두각시인 고종은 왕실 사치 충당위해 외척을 시켜 악화를 마구 찍어내 곧바로 왕실 수입으로 잡았다 가산제가 돼버린 것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당시 조선 동전유통량은 2천만냥으로 추산되는데
1893년엔 7~8천만냥으로 늘었다 대규모 인플레를 유발, 물가는 치솟았다
1882년 한성의 찹쌀 1석은 18냥 이었으나
1994년엔 144냥, 소금은 5냥에서 40냥,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 였다
왕실 지출의 주용도는
고사와 다례.1893년에만 총29회 고사와 다례가 있었고
궁중 연회도 37회,
1894년 고종 생일 축하위한 연회엔 220만냥을 썼다
연회가 끝나면 일본서 수입한 쟁반에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 지겟꾼시켜 진객들에게 배달했다1
893년에는 고사 다례 연회에 사용된 식재료등 총지출 444만냥중 247만냥이 지출되었다
조선 역사상 이처럼 사치와 연회로 국고를 탕진한 전례는 없었다
1904년 고종 즉위40주년을 맞는 칭경식때 무도회장으로 쓰려고
덕수궁내 대리석 석조전을 짓고
예포 쏠 군함 타고 갈 승용차를 구입했고 선물도 산더미로 마련했다
군함은 영국이 10년간 쓰던 석탄운반선을 일본서 구입해 한동안 쓰다 석탄 많이 들어 처박혀 있는걸 조선의 요청으로 대포만을 얹은 것 ,
이들 비용만 한해 예산의 3분의2에 달했지만 전염병으로 식은 치루지도 못했다
국고 사정은 날로 악화,
1873년 금 보유 151냥이
1886년엔 58냥,
현금은 163만5천498냥에서 15만천353냥으로 줄었다
1770년대 매연말 중앙정부 각 기관이 보유한 자금은 총500만냥을 넘었지만
1880년대에는 100만냥으로 줄었다
19세기말
청국 조정 1년예산은 1억냥,
일본 정부도 비슷한 1억냥이었다
고종당시 조선의 연간 예산은 30만냥에 불과 했으며 일년 예산의 3.1배를 일본 정부에 빚졌다
각 도로부터 들어오는 세금은 전무한 상태고 국고는 완전 고갈되었다( 호로스 알랜 미국공사 1898.12)
갑신정변후 고종은 청 이홍장에게
조선의 정치 외교 행정등 모든걸 맡아할 강력한 관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해서 온 원세개는 무소불위 안하무인이었고 3천명 주둔 청군들의 횡포는 거칠것 없었다
1893년부터 정부 주요관직은 민씨 외척이 다 차지한 가운데
고종과 민비는 매관 매직뿐 아니라 매과(과거시험)까지 손 댔다 . 전무후무한 일이다
10년간 당상관(괄호 안은 당하관 숫자)이 이조 7명(9) 호조 3명(6) 예조 7명(9) 병조 5명(25) 형조 18명(35) 공조 24명(18)이 바뀌었다
지방관 관직거래액은
8도 관찰사(종2품)가 2만~5만냥,
부사(종3품) 5천냥 군수 또는
현령(종4~5품) 1천 ~2천냥이었다
조선은 망국으로 가는 폭주 기관차 였다.
이른바 '홉스적 자연상태'가 조선에서 완벽하게 재연되고 있었다
사회는 붕괴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적나라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문화와 윤리가 붕괴되고
서로를 뜯어 먹고 속이고 등쳐 먹고
사기치고 죽이는 극단적 야만 상태다
일러전쟁이 발발하자 체재개혁 운동에 나섰다.
역모죄로 한성감옥에 갇혀있던 이승만은
조선의 운명이 끝났다고 직감, 불빛 새나가지 않게 항아리 뒤집어 쓴채 '독립 정신'을 써 내려갔다'
세계 인민중에서 제일 불쌍한 백성은 조선 백성인데 그 불쌍한 까닭은
남의 나라 이민들은 國중에 법률이 소상하고 학문이 진보하여 사람마다 법률만 범하지 아니하고
자기 힘과 재주가 있으면 벌어 먹고 세상에 자주독립한 백성이 되어
빈부 귀천간에 사람마다 자기신상에 자유권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마다 자기 직분만 하게되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없고
누구에게 천대 받을일도 없는지라
조선은 법률도 소상하지 않고 사람들이 학문이 없어 벌어 먹을 도리가 두가지 밖에 없는지라
한가지는 농사를 하든지 , 짐을 지든지 하여 겨우 연명하는 것이요 ,
전국의 형세가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여 한 뿌리가 되어
그 땅과 그 정부와 그 임금을 모시고 한자루 독립하는 나라가 될 기미는 없어지고 ,
서로 해하려 하며 서로 잡아 먹으려하여
큰고기는 중고기를 먹고 중괴는 작은 고기를 먹으며 작은 고기는 송사리를 먹어
한 나무에 매달린 뿌럭지들이 서로 해하려 하니 어찌 그 나무가 잘 자라며 성해 지리요
그중 괴상한 등분과 층등과 당론과 편색을 나눠 가지고
한나라 안에 한등걸 밑에 있으면서 서로 각심과 서로 私情으로 사람들을 박대하며 서럽게 구니
이것이 나라에 어찌 有助한 까닭이 있으며 기외에 허무하고 경계 없고 이치없는 풍속으로
사람들을 살려 놓고 ,못살도록 하는 일이 많아 전국에 원망가진 사람이 많이 있으니( 독립신문 1897.6.10)
일본은 러시아를 의식 1889년1월 군비증강을 담은 군사의견서를 발표하면서 '주권선' '이익선'을 선언했다
오스트리아 빈대학 정치경제학교수 로렌조 폰 슈타인의 이론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유학시절 배웠다
주권선은 주권이 직접 미치는 국토 범위고
적성국 지배하에 들어가면 자국안전을 위협하게 될 지역인 이익선을 방호 할수 없다면
완전한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것
이것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정치와 전략의 핵심이다
영국 외무차관이자 아시아전문가 커즌은
1894년 청일전쟁을 전후한 '극동문제'를 발표하며
"조선은 여러 강국 사이에서 농락당하는 장난감 공의 정치상 미래운명" 이라며 "
여러 강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보호 받든지 아첨하든지 능욕당하든지 총애를 받든지 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 이었다
고종과 민비는 그럼에도 패권국 영국을 비롯한 해양세력의 의도를 끝내 거스르고
청의 힘 빠진뒤론 악착같이 패권 도전이자 곧 망할 러시아에 들러붙어 멸망을 자초했다
강화도 조약때까지 국제법이 뭔지 조약이 뭔지 관세 항세가 뭔지도 몰랐던게 조선이다
문서도 남의 나라가 써주고 속방국이라는 부속문서를 상대국의 거부에도 꼭 보냈다
동학난은 발발 취지문 '무장창의문'이나 전봉준의 취조 신문서를 보면
유교봉건제 틀안에서의 민란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동학난을 시작으로 청일전쟁 일러전쟁 망국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은
고종 민비 두 암주가 초래한 무지무능의 소치였다
나라운명이 걸리는 전쟁무렵 조선이 한 것이라곤 청일전쟁이 임박한 시기
민비는 세자(순종)의 복을 빌기위한 기도행사에 여느때처럼 나라재정을 물쓰듯 해
금강산 1만2천봉 마다 돈1천냥 쌀 한섬 비단1필씩 올려 놓고 치성드렸으며
매년 여름엔 한강에서 수신제를 올려 쌀500석 밥을 지어 던져 물고기들을 먹였다
일러전쟁중 전세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고있던
1904년11월 고종은 무당의 말대로 궁궐기둥 밑에 커다란 솥을 묻고 러시아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
서쪽에는 영국이 있고 북쪽에는 러시아가 있다네 동포여 조심하라!
겉으로 그들은 조약을 맺는다네 그러나 그들의 가슴속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알수 없다네
국제법이 있는건 사실이라네
그러나 때가 오면 기억하라 강자가 약자를 먹어치운다는 것을!
"청일전 승리후 외교전서 굴욕을 안긴 러시아대한 설욕을 벼르며
일본 국민이 이런 유행가 부를때 조선에선 기껏 "
새야 새야 앉지마라 녹두밭에 앉지마라.. "를 부르고 있었다
1904년1월4일 호러스 알랜 미공사는 국무장관에게 서신을 보낸다"
우리는 감정에 치우쳐 이 제국(대한)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큰 실수가 될 것입니다
이사람들은 자치할 능력이 없습니다 . 그들은 늘 그랬듯이 상전( overlord)이 있어야 합니다
일본이 그럴 능력이 있으면 조선을 가지라고 하지요. 잘 아시다시피 나는 친일파( pro - Japanese enthusiast )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문명화 된 인종이 착한 아시아인들의 운명을 책임지면서 인민들의 안녕을 위하고
억압적인 관리들을 억누르면서 질서를 세우고
상업의 발달을 위해서 일 하는 것에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
' 북부지방과 서부지방에서 어디든 가는 곳마다 잔학행위를 저지르는 러시아인들 ,
러시아인들의 저주받은 흔적은 불탄 마을 살해된 여성과 아이들, 파괴된 들판으로 나타난다
불과 피는 러시아인이 좋아하는 전쟁수단이다
일본에게 패한 야만인은 절망적인 조선인에게 자신들의 무력한 분노를 발산하고 있다
조선인은 호소할 곳이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황제는 궁궐을 짓느라 분주하다 .
무당과 점쟁이들이 있는 방 두칸에서 시간을 보내는 황제 ,
난방을 한 곁방 밖으로 나와 한낮의 햇빛을 보거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시간도 없는 황제,
권력이 일상이고 부패가 즐거움이고 음모가 인생인 황제,
이 황제는 이 저주받은 나라의 저주받은 백성들로부터 갈취한 몇백만원의 돈을 불타 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쓸모없는 궁궐짓는데 낭비하고 있다' (1904.5.2 윤치호일기)
1905년7월29일 루스벨트 명에 따라 태프트미육군장관과 일 가쓰라총리간에 '
미국의 필리핀 점령 일본의 한반도지배 묵인' 밀약을 맺고
그와함께 아시아 순방중인 대통령 딸이 9.19 조선을 방문하자
고종은 엄비시켜 민간에게 거금 빚 얻어가며 선물 마련하는등 국빈같이 극진 대접했다
그렇게 우호의 축배든지 두달도 안돼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독립 유지할 의지도 능력도 없음을 안 열강들은 조선을 버렸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고 감독하고 지도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 "( 1905.1 미 루스벨트가 주미일공사에게)
"일본이 조선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
다만, 조선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유지하고
모든 국가들에 조선과의 교역과 산업에 있어서 동등한 기회를 제공 할것"(영국)
"포츠머스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절대적인 이해(predominant interest) 인정한다"(러시아)
고종에 대해 알랜 주한미공사는
"병적으로 미신에 빠져있으며 갑오개혁후 궁중에서 쫒겨났던 무당들이 다시 궁중의 모든일에 영향력을 미치고 국고로 들어 가야할 세금을 가로챘다"고 했고
주한영총영사는
"가장 어리석은 인물, 나라를 다스리는 유일한 기술이란 적대적 세력을 대립시켜
자신의 안전을 보호 하려는 것 뿐,
그 결과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망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평했다
고종은 끝까지 비겁했다
이토 : 조선이 보호령안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조선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고종 : 대신들과 의논하겠다
이토 : 대신들과 논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대한제국 헌법에 의하면 고종이 전제권을 갖고 모든것을 결정할수 있는데 새삼 백성들의 뜻을 묻겠다는 것은 무스 뜻인가?
고종 : 대신들과 논의 하겠다(1905.11.15 고종이토면담)
고종은 병합 순간에도 끝까지 일신의 안락에만 매달려 일 천황가에 편입시키고도 뒷처리 조약은 대신들에게 떠맡겼다.
조선 이태왕(고종)의 예우는
천황 다음으로 총리대신 연봉의 5배이며
그 일가도 호사를 누리며 일제국 패망때까지 30년을 존속했다
暗主답게 고종은 깨끗한 분절의 패망보다 지저분한 생존을 택했다
한일병합 공포,
그것은 사그라드는 잿속 마지막 한톨 불씨 스르르 꺼진 것이다
1910.9.28 장안은 총 한방 저항의 외침소리 하나 없이 그저 평온하고 조용했다"
대한제국이 제2의 이집트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독일)
"한국인들은 이제부터 조선왕조의 가혹한 가렴주구 통치서 벗어나 문명개화의 길로 들어 섯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오히려 행복 해 질것이다"(1910 영 이코노미스트지)
"일본이 남의 나라 망하게 할수있는 실력 가진 것만이 문제 이겠는가?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도 어쩌겠는가? "(중국 지식인 양계초)
일본의 조선 식민지정책은 개화 발전을 통해 더 큰 이익을 취한다는 정주형을 택했다
이토히로부미가 유럽시찰중 만난 독 비스마르크의 식견을 본보기 삼은 것이다'
40% 수탈 ' '한손엔 측량기 또한 손엔 피스톨' 이것은 모두 허구다(이영훈교수)
조선은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국호도 중국이 지었고 책봉 - 조공체제의 제후국이었다
양반의 나라요 노예제사회다
제민족 제백성으로
인구의 40%인 노예(노비)를 포함해
70%의 상놈
백성이 3%의 양반을 치받들며 살아야 했다
양반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
상놈은 유식 똑똑해서는 안되고 부유해서도 안된다
체제 위협세력이 될까봐서다 이들은 양반을 지탱할 생산의 도구이자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노비는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혹여 글이라도 읽을라 쳤다간 치도곤이 난다 . 가치 금액도 매겨지고 재산목록엔 첫번째다
태종때까지 억제 상한제였으나
세종때 양산제인 종모 종천법으로 바꿔 최고 인구의 60%를 넘기도했다
양반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
세종은 노비가 소송할수 없게 법적 권리를 완전 박탈했다
노비가 주인 고소하면 교형(목 매달아 죽임)에 처하게 했다 죽은 목숨이다
또 관기의 자식은 영구히 관기거나 노비로 했다
초대 프랑스공사 빅토르 콜랭드 플랭시가는
1888.4월 동물들과 동일시 하는듯한 끔찍한 조선 노예제를 언급하며
"여러 보고서에 의하면
한반도는 아직 야만적이어서 현재관습을 버리고 문명화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상하기 힘듭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세종의 사대주의는 지극했다"참람하다"
제후가 돼서 어찌 천제를 지내냐며 폐지했고 땅에 대한 제사도 역월제도 없앴다
제후를 자처했고 황제와 '부자지간'으로 자리매겼다
해마다 처녀공출도 열성이었고 , 환심 사려고 한겨울 추위 잡힐까말까 그 진귀한 청매 한쌍 보내고 나서도 또 한쌍 더 보내야 마음편했다
백성은 없었다
세종이 죽은후 황제는 "참으로 효성이 지극한 왕이었다"고 했다
중종때부턴 황제한테만 하던 3배5구두(3번 절하고 5번 바닥에 머리 찧느것)
예를 중국 사신단에게도 모화관까지 나가서 했다
금속활자 훈민정음(한글) 해시계 측우기를 발명해 냈어도 백성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일하지 않는 양반의 전유물이었다
한글은 450년동안 '지하'신세 였고
서양선교사에 의해 빛을 보다가 일본이 본격 보급했다
1910년 조선의 농업생산성은 일본의 60% 중국의 55%에 불과 했다(제임스 팔레)
120년뒤 구텐베르크가 만든 활자인쇄기는 종교혁명 지식 혁명으로 번져가며 막대한 이윤을 창출해 냈다
조선의 잘난 양반들이 실력도 능력도없이 상대를 깔보고 없수이여기다 번번이 자초한 외침으로 겪지않아도 될 고초로 죽어나는 건 백성들 뿐이었다
엄동설한 인조가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오랑캐' 앞에서 머리를 찧고,
선조가 임진왜란때 '왜'군들에 쫒겨 허둥지둥 피난길 오르는 일 있었어도 왕조에 변한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를
죽은 자,
산 자,
그리고 바다로 나간자 세부류로 나뉜다 했다
조선의 바다는 바다가 아니었다
500년간 민간이 바다로 나가는게 금지됐다
중국 갈때도 뱃길 허용 않되고 몇달씩 육로만 가야했다
기술 상업같은 걸 아주 천시 경멸했지만 일본만 해도 존중하고 도공은 최고 대우에 예우받았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개발한 화려한 채색 도자기들은 유럽시장을 휩쓸며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 줬다
영국 왕실박물관의 아리타야키(이삼평) 사시마야키(심수관)가 그들 것이다
아리타역사서에는 ' 이 대포도 군함도 아리타 자기가 가져다 준 것임을 기억해야한다 '고 기록하고 있다
아리타야키의고향 아리타산 정상에는 도조 이삼평을 대은인(大恩人)으로 칭송하는 문구를 새겼다
비슷한 시기 조선 도공들은 양반들의 애완용 도자기를 만드는 수준이지만,
1795.8.6 도자기굽는 분원에서 정조에게 " 기묘하게 기교부려 제작한 것들이 있다"는 보고를 올리고 이를 접한 정조는 "쓸데없고 긴요치 않은 것은 일체 만들지 못하도록 하라"고 엄명,
이후 조선 도자기 산업은 사양화로 간다
1600년대 연은 분리제련기술을 개발한 조선의 김갑불과 노비 김검동을 데려간 일본은
은을 대량 채굴 , 세계2위 생산국이 되었고 은제품수출로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일 막부는 1634년 나가사키 앞바다 인공섬 데지마에 네덜란드만의 상관을 설치,
당대 최대규모 최고상술 정보력갖춘 네덜란드동인도회사를 유치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등
서구문물을 수입하고 대신 도자기 칠기 은제품등을 대량 수출했다
별단풍설서(정보보고서)를 의무적 받는 조건이었기에 막부는 앉아서도 세계 동향을 꿰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로 1640년대 최고 주식싯가총액은 지금으로 환산해 7.5조 달러에 달했다
1820년 일본은 세계7위의 부국이었다'
일본 에도(도쿄)의 번화한 도시풍경이 놀라울 뿐이었다.
상거래와 무역규모에 입이 떡 벌어졌지만
이미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16세기 포르투갈,
17세기엔 네덜란드와 왕성한 무역을 해왔다
거리에는 온갖 물건을 파는 점포들이 즐비하고 길은 평평하고 곧으며 티끌하나 없었다
화려한 옷과 치장을 한 구경꾼들로 넘쳐났고
사방팔방 부자들 것으로 보이는 웅장하고 화려한 집들이 수천 수만호에 달했다
빽빽이 늘어서 구경하는 일본남녀 모두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것은 서점인데
중국의 책은 물론 조선의 책까지 온갖 종류별로 모두 구비해 놓은 서점의 규모며
통신사 수행도중에 쓴 시문이 돌아오는 길에 출판 , 진열되어 있는 출판시장의 속도는
한마디로 경이로움이었다
특히 국가기밀에 속하는 류성룡의 <징비록 >같은 책들도 유통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기강이 엄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었다
( 1719년 조선통신사 수행원 신유한)
조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1853년 처음 나타난 미 군함을 본 도쿠가와 막부는
군함 선박건조 필요성을 느끼자 오구리 타다마사는 건설계획을 입안했다
그는 이미 미에 건너가 워싱턴DC의 해군공창을 견학하고 느낀바 있던 터였다
그러나 막부재정이 넉넉지 않다는 이유로 많은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오구리는 "막부정권은 유한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는 무한하다.
막부가 한 일이 장기적으로 일본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도쿠가와家의 명예이자 국익이 아닌가" 라며 설득 ,
1864년 프랑스의 타당성 조사거쳐
1865부터 24만평방미터 부지에 4년간 240만달러가 소요되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도중에 내전 보신전쟁으로 신정부군이 조선소를 접수하지만
메이지시대에도 공사는 계속해 1871년 완공됐다
오구리는 항전 굽히지 않아 참형되지만 그의 유언따라 딸은 명문가로 시집갔고
쓰시마해협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완전 격파한 도고 헤이하치로원수는
오구리가족을 초청 오구리정신을 기렸다
그는 이순신전술 전법연구가이도하다
태평양전서 활약한 전함 무쯔와 항공모함 시라노등 여러 군함도 여기서 건조됐다
선진 문물을 따라잡으려는 일본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하급무사들이 주축,성공시킨 메이지혁명이지만 불과 3년후 나라가 텅텅 빌 정도로 해외로 나갔다
공식비공식 200명의 이와쿠라시찰단이
1871.12.23부터 2년간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러시아 독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해등 모조리 누볐다
19세기말 서양학문에 능통한자들이 100만명에 달했다
1870년 천황은 수십명씩 국비 유학생을 선발, 서양에 보내 유명 교사에게서 교육받게 했다
재정 아끼지 않고 인재양성, 해외 유학마치면 학문과 재주에 따라 관직에 임명했다
일본 魂만 뚜렸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모든걸 받아 들였다. 그리고 끊임 없이 혁신했다
1873부터 국방체제를 근대화,
1887 유군참모대학 을 설립했다
1880에 예산의 10%를 1890엔 예산의 31%를 썼다
초등학교가 1875년에 2만개(종교시설 포함) 남녀공학 고등학교 제국대학제도를 정착시켰다
1880 메이지헌법에 따라 내각제도(1885)와 전문관료제가 확립됐다
1882년에 일본은행 설립취지는 시장경제 철학이 여실했다'
무릇 정부의 본분은 국가의 강녕을 보전하고
민서(국민)의 치안을 도모하는 것에 있다
결코 인민과 이익을 다투는 것에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교육 외교 해.육군備 경찰보호등 국가안보를 유지하고 통치(민치)를 보호하는 사업은
본디 정부가 실로 스스로 해야할 의무인 것이다
그 상업 무역등과 같이 인민과 직접적으로 이익을 다투는 사업은 정부가 감히 스스로 해야 할것이 아니다 '민선의원설립 건백서는 "민선의원을 세우는 것은 즉, 인민을 배워 알게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루빨리 개명의 지경에 이르게하는 방도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정부가 직분으로 이를 만들어 목적으로 삼는 것이 곧 인민이 진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고 했다" 식민지가 되기 싫으면 스스로 강대국이 돼라
"일본은 자기부족을 인정 할줄 안다 어떻게 해서든 배워 나라가 잘 살고 강해지려 했다
청일전때 사용한 '무라다' 소총은 전세계에서 능률과 정밀도에서 가장 우수한데
각국의 총들을 수집 수년간 연구개발 해 낸것이다
일본은 청일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외교전으로 훼방 논 러시아를 설욕하기 위해 함대건설에 모든 걸 쏟았다"
그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
조선 500년은 무었이었나
백성은 없고 교훈도 없으며 100년대계는 더더욱 없었다
남긴건 사대와 불구대천의 당쟁 반문명적 야만 과 끔찍한 가난 뿐이었다
백성 삶을 위한 실질은 없고 껍데기뿐 조선왕조의 권위는 중국 황제에게서 나왔다
삼강오륜을 내세우지만 조선을 지배하는 건 공포와 惡 반문명이었다
조선 백성에게 최고의 방어막은 가난이다
이 정권이 안동을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정한 것은 크게 잘못 된 것이다
한국인의 정신은 대한민국 건국이념에 담긴 자유민주와 그리스도적 박애다
지금 동북아 정세속에 처해있는 한국문제의 본질은
反中
4.15 부정선거
우한바이러스다
공산당의 중국은 국가 자체가 범죄단체다 인류의 암적 존재다'
절대 망할수 밖에 없는 구조' '패권이 아니라 생존 여부를 걱정해야'
현대판 노스트라다무스
글로벌분서가인 조지 프리드먼과 피터 자이한의 이같은 진단은
패권국 미국이 중공을 주적 전체주의로 규정하기 이전의 예측이었다
13억 인구중 6억명이 가구당 하루3달러 미만의 벌이로 살고
4억4천만명이 6달러 미만으로 살고 있는데
30년 후엔 30%의 젊은이가 70%의 노령자를 부양해야 하는 인구 구조상 비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에 의해 공산당 붕괴는 빨라 질것이다
그럼에도 이정권이 중국에 들러 붙는건 공산당 처럼 독재 영구집권으로 가기위해서다
조선의 속방처럼 정권 유지만이 목표다
민주주의로는 불가능 하다
이들에게 국가나 국민경제 보다는 중요한건 오직 정권이다
이를 위해서 도움되는 것이라면 뭣이든 할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적과 친구를 확실히 구분하는 것이고 ,동맹은 전쟁을 함께하는 것이다
6.25때 중 공산당은 대한민국 국토를 침략했고
4.15총선때에는 문정권과 함께 주권을 침탈했다
이 부정선거는 단일사건으로 끝나는게 아니다 그대로 묻힌다면 앞으로의 모든 선거는 의미가 없다
자유민주주의는 없다
우한바이러스는 독일 연방첩보국에 들킨 대로 인위적인 것이고 이미 지난해 9월 처음 발생했다
공산당이 하수인격 WTO와 짜고 5개월간을 숨기면서 전세계로 퍼트린 천인공노할 죄상은
별개라 치고, 우리 입장이 이래서는 안되는것 아닌가
이정권이 의도적이라 할밖에 없이 마구 들어오게 해 퍼진 우한바이러스를
자연재해나 자연발생처럼 받아 들인다
게다가 정확한 치명성 사회적 비용등 묻지도 따지지도 못한채 정부의 강압적 일방적 몰이에 숨도 못쉰다
실험이 완전히 끝나지도 않은 중공백신 맞은 자들을
그냥 들이고 중공바이러스 연구소를 한국에 세우려고 했다
저들은 노예사회 조선백성을 지금 실험하고 길들이고 있는지 모른다
6.25의 영웅 맥아더는 의회에서 한 퇴역고별사에서
" 한국인이 보여준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놀라운 것 " 이라면서
" 차라리 공산주의 노예로 사느니 죽음을 무릅쓰려 했다 "고 경의를 표했다
지금 당신은 한국인인가 조선인인가?
2020.11.17 空江 김종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