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 만행에 항의한 학생들 학살한 현대사 참극 1.
(서울=연합뉴스) 이대희 기자 = 이달 23일이면 해방공간에서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과 공산당의 횡포에 항거한 학생운동인 '신의주학생의거'가 7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올해가 신의주 의거 70주년이 된다는 사실은커녕 신의주의거가 어떤 날인지 제대로 아는 이도 많지 않다.
22일 이북5도청과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 등에 따르면 신의주학생의거는 학생 저항운동일 뿐 아니라 소련군이 맨주먹인 어린 학생들을 전투기까지 동원하며 무력 진압해 23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다친 한국 현대사의 참극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이 그렇듯, 학생 의거도 어떻게 보면 사소할 수 있는 소동에서 시작됐다.
1945년 11월 18일 소련군이 주둔한 평안북도 신의주 서쪽에 있는 용암포에서는 공산당 주도로 인민위원회를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인민위원회는 광복 직후 전국 각지에 조직된 민중자치기구다. 연단에 올라간 학생대표는 애초 축하 연설을 하기로 돼 있었지만 연설 도중 소련군과 공산당의 행패를 규탄하기 시작했고, 군중도 이 연설에 동조하며 분노했다. 군중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었다. 소련 군정 상태였지만 한반도 최북단 접경 지역인 신의주는 사실상 치외법권 지대였다.
소련군은 여성들을 겁탈했고, 군정을 등에 업은 공산단체도 약탈 등 행패를 일삼아 공산주의에 대한 염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공산당 환영대회가 순식간에 공산당 규탄대회로 변해가자 당황한 주최 측은 이를 무력으로 막는 데 급급했다. 소련군과 공산당은 경금속 공장 직공들을 동원해 군중을 급습, 평안교회 장로 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학생과 시민 11명이 크게 다쳤다. 신의주 학생자치대는 공산당과 소련군 현지 사령관에게 사건의 사후 처리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분노는 들불처럼 퍼졌다.
격분한 신의주동중학교와 제일공립공업학교 등 6개 중학교가 주축이 된 지역 학생 3천500여명은 11월 23일 오후 2시 행동에 나섰다. 학생들은 "공산당은 소련군의 군사력을 악용해 약탈·불법·기만 등 갖은 학정을 자행하고 있다"며 "적색 제국주의 침투를 위해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획책해 이를 좌시할 수 없어 궐기한다"는 호소문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이어 4개조로 나눠 각각 평북 인민위원회, 공산당 본부, 신의주 보안서(경찰서), 재판소를 향해 행진했다.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울려 퍼지던 신의주 시가지는 공산당과 소련군이 진압에 나서자 참혹한 '킬링필드'로 변했다.
공산당 보안대와 소련군이 전투기와 탱크,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동원해 학생들을 덮친 것이다. 결국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700여명은 크게 다쳤다. 살아남은 이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체포자는 1천여명에 달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시베리아로 끌려가 생사가 묘연하다.
신의주학생의거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반공 학생 의거로, 뒤이은 평양과 함흥 등 북한 지역의 반공 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56년에는 학생의거가 일어난 11월 23일이 '반공 학생의 날'로 지정될 정도로 대표적인 반공운동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1973년 각종 기념일이 통합 폐지돼 반공 학생의 날이 사라지면서 신의주 학생 의거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히고 있다. 23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는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 등이 주최하는 '신의주반공학생의거 70주년 추모대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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