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천구 (정치학자, 前 영산대 총장)
사람의 외모와 내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은 어디가 다르게 생겼을까? 얼굴이라는 말의 어원이 얼꼴이라는 설이 있다. 얼은 혼을 말하고 꼴은 형태라는 뜻이니 얼굴은 그 사람의 정신이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란 이야기다. 동서양에서 관상학이 발달한 것은 얼굴에 그 사람의 심성과 운명이 나타난다고 보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착한 사람을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고 하는데 그런 부처님의 상(像)은 단정하고 복스럽게 조성되지만 악마는 흉측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막상 부처님 자신은 경(經)에서 몸의 상(相)으로 부처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주1)
과연 사람을 상으로만 판단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경험상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속내를 외모에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사기꾼들이 그렇다.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는 것은 사기꾼이 전혀 사기꾼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관상은 참고는 하되 너무 의존할 것은 아닌 것 같다.
2013년 개봉하여 인기를 끌었던 영화 《관상》은 백발백중 맞추는 어느 관상가가 나라에 발탁되어 활약하는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여기서 문종은 어린 아들(후일 단종)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불안하여 그 관상가에게 수양대군(후일 세조)의 관상을 여러 번 몰래 보게 한다. 관상가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할만한 관상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문종은 안심했으나 그가 죽은 뒤 수양대군은 관상과는 달리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충신들을 죽였다.
그 때 쫓겨난 관상가에게 후일 어느 재상이 찾아가 관상에 백발백중이던 당신이 왜 그랬냐고 물었다. 자기는 수양대군의 관상만 보았지 나라에 불어오는 바람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고 관상가는 회고했다고 한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과 같이 한 사람의 실체를 알아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예전에는 신랑감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보았다. 신(身)은 이목구비와 사지가 멀쩡한가를 보는 것이니 관상에 해당한다. 언(言)은 말을 시켜 사리에 맞게 잘 하는가를 보는 것이고 서(書)는 글을 반듯하게 잘 쓰는가를 보는 것이다. 판(判)은 함께 여행도 다녀보면서 판단을 잘 하는가를 살펴본다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는 관상보다는 재주와 덕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재주보다 덕이 많은 사람이 착한 사람이고 재주는 많지만 덕이 부족한(才勝薄德재승박덕) 사람은 악할 소지가 있는 사람으로 경계한다. 중국 북송(北宋) 때 유학자인 사마광은 그가 편저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재주와 덕에 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재주와 덕은 “서로 다른 것인데 세속에서는 구별할 수가 없어서 그냥 통틀어서 현명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람을 잃는 이유이다. 무릇 총명하게 살피고 용맹스러운 것이 재주이고 정직하고 치우치지 않으며 화합하는 것이 덕”이라고 하였다.주2)
사마광은 재주와 덕의 조합에 따라 사람을 네 가지 종류로 분류하였다. 재주와 덕을 완벽하게 다 갖춘 사람은 성인(聖人)이고 재주도 덕도 모두 없는 사람은 우인(愚人), 즉 어리석은 자이다. 재주보다 덕이 많은 사람은 군자(君子)이고 재주는 많지만 덕이 부족한, 재승박덕한 사람은 소인(小人)이다.
그런데 그런 소인에게 나랏일을 맡기면 어리석은 사람에게 맡기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나쁜 일을 하려고 해도 지혜와 힘을 감당할 수 없어 한계가 있지만 소인의 지력은 충분히 그 간사한 짓을 완수할 만하고 용기도 그 포악한 짓을 결단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건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람과 집안을 망치는 자식은 재주는 넉넉하지만 덕이 부족한 소인들이라고 한다.
악의 평범성
20세기 전체주의 국가의 등장은 이런 소인의 위험성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600만 유태인 학살(홀로코스트)의 주역 중 한 사람인 나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모습을 통해서였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도주해 은신해서 살다가 이스라엘 정보기관에게 체포되어 예루살렘에 끌려와 재판을 받았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탈출하여 프랑스에 머물다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여 20세기 최고의 정치학자가 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재판과정을 1961년 예루살렘에 가서 직접 참관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이미 고전이 된 유명한 책을 썼다. 주3)
재판정에서 아이히만은 예상과는 달리 전혀 악한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가정에 충실하고 국가에 헌신해온 평범한 시민으로 보였다는 것이다.주4) 아렌트도 관심을 가졌던 관상학의 오류(Fallacy of Physiognomy)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범인의 평법한 외모에 감추어진 악의 실체를 밝혀냈다. 아렌트는 책의 부제를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라고 달았다.
아이히만은 검사의 추궁에 대해 자신은 한 사람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며 국가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른 것뿐이라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항변했다. 자기는 남을 죽일 권한도 없었으며 누구라도 자기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문제를 “생각하는 능력의 부재 또는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부재”에서 찾았다. 그는 악인들에게 나타나는 증오, 광기 또는 피에 굶주린 형태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쁜 “나치의 얼굴 없는 악”의 특징을 보여주었다고 아렌트는 썼다. 나치는 조직적으로 도덕법칙의 근본을 오염시켰고 법률의 범주를 파괴했으며 인간으로부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았다. 아이히만은 자기가 악을 행하고 있지 않은가를 반성해 보지 않고 기계적으로 상부의 명령을 따랐던 것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오직 선(善)만이 깊이가 있고 선만이 과격할 수가 있는데 악은 깊이도 없고 악의 범주도 없기 때문에 오직 극단적인 것만 가능하다. 이런 극단적 악은 생각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고 나치가 만들어 준 매뉴얼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가스실에 보내질 사람을 선정하고 다른 사람은 그들을 열차에 태우고 누군가는 가스실에 가스를 보내고 하는 일들을 각자가 맡은 역할대로 행했기 때문에 죄의식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나치는 물론 소련을 비롯한 공산전체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끔찍한 대량학살들은 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사마광의 소인을 닮았다. 소인은 이익과 욕심을 쫓는 평범한 사람이고 군자는 도덕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민주화 시대라지만 국가의 경영을 재주는 뛰어나지만 덕이 부족한 평범한 소인에게는 맡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소인 또한 그런 직책을 탐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국가 전체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큰 재앙이 되기 때문이다.
소인은 평범한 시민으로 살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중요한 직책에 오르면 어리석은 사람보다 더 큰 문제가 된다. 군자는 재주를 가지고 선한 일을 하지만 소인은 재주를 가지고 악한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웃집 아저씨 같이 평범하게 생긴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전체주의의 맥락에서 극단적 악을 행한 경우가 잘 보여주고 있다.
(2018년 2월 2일)
표지그림 출처
주1) 불교최고의 경전인 금강경(金剛經) 제5품에서 부처님은 “몸의 상으로 부처(여래)를 볼 수 있느냐(可以身上見如來不)?" 라고 묻고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니 상을 상으로 보지 말아야 부처(여래)를 볼 수 있다(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고 설법하셨다.
주2) 본문은 夫才於德異, 而世俗莫之能辯 通謂之賢, 此其所以失人也. 夫聰察强毅之爲才, 正直中和之爲德. 司馬光 編著, 《資治通鑑》 周威烈王 23년의 기록
주3)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First published in the U.S.A. by Viking Press in 1963. this 2006 edition is published by Penguin Books.
주4) 당시 아이히만을 진찰한 법정의 정신과 의사는 아이히만이 “완전히 정상인이며 어떤 면에서도 진찰한 후 나보다 더 정상이다”라고 보고 했다. 이런 정상과 끝을 알 수 없는 잔혹성이 공존하고 있는 현상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신념을 뒤집는 것이고 재판의 진정한 수수께끼였다고 한다. 위의 책. introdu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