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評論誌, 북 리뷰>
송재운 박사(동국대학 명예교수)
한국에서의 불교와 유교
宋錫球 교수의 최근 저서 <송석구 교수의 불교와 유교강의>는 불교 전반과 유교 전반을 논한 것은 아니다. 부연하면 불교와 유교에 대한 일반적인 교리나 학술적 이론을 강의 형식을 빌어 다룬 것이 아니란 뜻이다.
책 제목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전적으로 한국 불교와 한국 유교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래서 한국에 있어서, 그것도 조선조 이후부터 근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불교와 유교가 어떻게 갈등하고 또한 공존 하면서 이 나라의 사상과 문화를 이루어 발전시켜 오고,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는 정치철학과 이상을 세워 왔는가 하는 데에 논구의 촛점을 맞추어 놓고 있다.
국판 500페이지 가까이 이르는 이 방대한 저술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장 제목만 적어 본다.
1. 조선시대의 불교와 유교 논쟁
2. 불교와 유교의 인간관
3. 한국불교에서의 지와 행
4. 지눌의 인간관
5. 지눌의 간화 결의론
6. 불교의 인성론(대승기신론을 중심으로)
7. 불교와 율곡 철학
8. 불교적 효도관(불교적 효와 유교적 효)
9. 원효와 지눌의 염불관
10. 율곡과 원효(이통기국과 일심이문의 실천적 수행의 유사성)
송석구 교수는 학문 이력이 단순치 않은 학자이다.
이 책의 서문 격인 <체험의 철학>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철학을 하기 위해 다른 유수한 대학에 철학과가 많음에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철학과를 택하였고, 석사는 서양윤리, 박사는 율곡철학을 했으며, 위의 장별 목차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학 전공학자가 아님에도 그와 못지 않게 불교학 논문을 내어 놓고 있다. 이런데에서 평자는 50년대, 60년대를 통털어서 같은 철학이라 해도 ‘목탁철학’이라하여 동국대 불교대 철학과는 아주 인기가 없었는데 그가 굳이 여기서 학문을 닦은 소이연을 알게 된다.
당시 송석구 학생은 철학을 하되 불교 속에서 하겠다는 의지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 씨앗이 열매가 되어 그는 서양철학의 맛도 즐기고, 대학 교수를 하면서는 儒-佛을 넘나들며 釋學과 孔學을 회통하고 있다. 남은 하나만 하기에도 힘들고 버거운데, 셋씩이나 짊어지고 이 나라 학계를 활보하였으니, 선가의 용어로 말한다면, 한 소식이 아니라 서너 소식 쯤 한 것이 아닌가! 부러운 일이다.
조선에서 유불의 논쟁
이 부분 ‘조선에서 유불의 논쟁’은 조선 개국초 三峯 鄭道傳(1337-1398)과 涵虛堂 己和得通(1376-1432) 화상이 시작하여 크든 적든간에 조선왕조 내내 계속되었던 것이다. 송석구 교수는 이 논쟁을 삼봉과 함허당에서 시작하여 불교가 권력으로부터 가장 혹심한 핍박을 받던 시기, <一正論>의 虛應堂 普雨까지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다음으로는 성리학의 전성기에 살았던 退溪 李滉과 栗谷 李珥의 불교관을 살피고, 壬亂이후로가서 西山 震黙 白谷 선사 등의 유불관을 천착하고 있다.
삼봉과 함허당
삼봉은 누구나 다 알듯이 조선의 개국공신 이다. 그리고 그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유교 즉 당시의 성리학으로 國是를 만들고, 나라 경영의 모든 제도를 확립 하였다.
종래 유교가 불교를 비판하는 기준은, 불교가 임금도 없고 부모도 버리는 멸인륜, 자기 홀로만 도를 깨치겠다고 입산하는 극단적 이기주의, 불사에 재정을 많이 탕진 하는 낭비.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삼봉은 <心氣理>편, <佛氏雜辨>을 지어 불교를 이론과 학술 차원에서 이기려 하였다. 心氣理의 심은 불교(심을 위주로 하니까)고, 기는 노교(老子敎, 기를 위주로 하니까)고, 이는 유교(理를 위주로 하니까)라 말한다. 삼봉은 이 심기리의 氣難心편에서는 노자의 기로 불교의 심을 비판하고, 心難氣편에서는 불교의 심으로 노자교(도가)를 비판한다. 삼봉은 그 다음 끝으로 理諭心氣편에서 유교의 이가 老佛 양씨를 잘 타일러 자신들의 잘못을 알게 해준다고 하였다.
이 말은 유-불-도 삼교에서 오직 理를 体로 하는 유교가 제일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송석구 교수는 ‘심난기’의 설명에서 삼봉은 도가의 기를 불교의 심으로 비난한 것인데, 삼봉이 불교의 佛性 즉 마음 자체가 기를 필요 없는 것으로 부정했다하여 다음과 같은 불교의 사대육신관을 피력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 四大肉身을 허망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이 사대육신에 집착하고, 그것이 곧 실체라는 것을 부정 할 뿐, 사대육신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불교의 심은 사대육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육신을 가진 자체애서 일체의 집착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불교의 해탈이나 열반은 육신의 죽음만을 의 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육신을 가지고 그 육신에 집착하는데서 번뇌나 망상을 떠나 자유자재 할 때의 열반이나 해탈의 의미가 강하다. 번뇌의 불을 끄는 것이 열반(nirvana)인 것이다. 따라서 삼봉의 비판은 불교의 일단면만 보고 한 것이다. 불교의 심을 사대육신(氣)과 대립하여 이해한 것이 잘 못이다.
삼봉은 도가로 불교를 비판하려다 도리어 몇 백년 후 송석구 교수에게 한방망이 맞고 말았다. 송석구 교수의 사대육신관은 불교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는 설법이다.
삼봉 불교 비판의 또 하나 핵심은 <불씨잡변> 중 ‘윤회지변‘ ’인과지변‘ ’심성지변‘ 같은 데에 있다. 삼봉은 성리학의 이기론을 빌어 불교의 인과, 윤회설을 부정하고 불교에는 심성의 구분이 없다고 때린다. 불교는 심을 성이라고 하니 우습다는 조다, 성리학에서는 심성정의 구분이 확실한 것을 그는 불교 보다 우월한 이론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함허당 기화득통(1376-1432)은 조선초 호불승으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 <儒釋質疑論>과 <顯正論>은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심기리>편에 대한 대론으로 씌여진 것이라 평가 받는다. 현정론(14개 문항)과 유석질의론(상하 19개 문항)은 모두 문답체로 되어 있는데, 두 책 문항을 합치면 모두 33항이다. 삼봉의 <불씨잡변> 20항에 비해 13항이 더 많다.
함허당 자신이 질문자이고. 동시에 대답자이다. 질문은 유자의 입장에서 하고, 답변은 불자의 신분으로 한다. 함허당이야 말로 유불을 회통한 승려다. 그러기에 그의 두 저술은 내용과 질에서 삼봉의 상위에 있다.
조선시대 승려들의 이러한 점이 유교의 막강한 공격과 탄압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었다.
송석구 교수는 함허당의 호불론에는 유교 교설을 예로 들어서 유자들에게 불교를 이해시키려는 사례들이 많은데, 이런 것은 불교가 유교에 대해서 교리를 절충, 융회 시키려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든다면 함허당은 불교의 불살생을 유교의 인, 불투도(도적질 안함)는 의, 불사음不邪婬은 예, 불음주는 지, 불망어(거짓말 안함)는 신이라고 한것(현정론)과 같다. 이것은 유교의 탄압에서 불교가 살아 남기 위한 궁여지책의 하나였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선조 유불의 이론적 대표자들이었던 삼봉과 함허당을 간단히 비교해 본다.
삼봉은 유교의 음양과 혼백설을 들어 정신사멸을 주장한 반면, 함허당은 블교의 진여심을 들어 정신불멸설을 세웠다. 삼봉은 인과의 문제에서도 기의 청탁, 후박설울 가지고 삼라만상의 참차부제를 말하고, 함허당은 법신불멸설과 업감을 가지고 三世因果, 罪福報應이 거짓이 아님을 설파했다. 그리고 함허당은 삼봉의 태극설에 맞서 ‘무극’을 ‘법신’과 같은 것이라하여 유-불 이론의 융회적 성격을 부각시키려 하였다. 또 삼봉은 주자학의 이기론을 기반으로 유교에서 心과 理가 둘 아님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心은 空하여 理가 없다고 비판 하였다. 그러나 함허당은 불교의 性을 大覺性, 心을 眞如心, 道를 覺道로 보아 노자교의 谷神, 玄牝, 유교의 虛靈不昧心 , 中庸之道와 비교 하였다.
이상과 같이 보면 두 사람의 내공이 보통 아님을 알 수 있다. 더 자세한 것은 송석구 교수의 강의를 통해서 이해하기 바란다.
허응당 보우와 임란 후의 유불
필자 송석구 교수는 조선시대 유불논쟁에서 불교가 가장 심하게 핍박을 받은 때는 성종, 연산, 중종조로 보고 있다. 이 시대 불교는 폭풍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기에 나타나 불교를 얼마간이나마 소생시켜 놓았던 인물은 虛應堂 普雨(1509-1565)라고 한다. 필자 송석구 교수는 “이 시대 승도의 으뜸가는 사람은 보우이다”라고 한 <명종실록>을 인용하면서, 당시 보우대사의 인품과 그의 수승한 佛力, 그리고 法力을 기술 하고 있다. 보우대사는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아 봉은사 주지가 되고, 그 2년 후인 1550에 선-교 양종을 다시 세운다. 양종의 승과를 두고 도첩을 주도록 하며, 서울의 봉은사를 선종의 본산, 양주의 봉선사를 교종의 본찰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불교중흥의 한시대가 열렸다. 훗날 임란 때 서산 사명과 같은 고승과 우수한 승병들이 나올수 있었던 것은 보우대사의 이 같은 선-교 양종의 중흥에서라고 한다.
보우는 유불을 융회 하는데 있어서는 ‘一正’이라는 독창적 개념을 세웠다. 그는 불교의 一心과 유교 <大學>의 誠意正心의 正을 합해 ‘一正’이라하여 유교와 불교의 相同性을 설명하였다. 또 유교의 一은 中이요, 誠이라고도 했다.
유교의 退-栗을 논하면서는, 그들이 극단적인 배불론을 내놓지 않고 불교와 가까이 하지말라는 정도의 권고(퇴계)만 한것은 굳이 크게 강한 배불론을 전개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퇴계와 율곡의 시대인 15-16세기 조선 사회는 이미 성리학의 전성시대였다.
그러기에 이미 다 쇠퇴한 불교를 극단론으로 배격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송석구 교수의 진단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는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된다. 또 유교에서는 전란으로 문란해진 사회기강을 다시 세우기 위해 禮學이 크게 일어난다.
이 시대의 불교계 큰 인물들은 三家龜鑑으로 유명한 西山大師, 유불 절충을 시도한 震黙大師, 諫廢釋敎疏로 유명한 白谷處能 등이다.
신분적 계급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일체중생의 평등성을 지향하는 불교가, 왜? 강한 신분계급 사회를 이루었던 조선시대 유교에 저항하지 못했는가?. 이런 학계의 질문에 대해서 송석구 교수는 여기 ‘조선의 유불 논쟁’을 끝내면서, 그에 대한 이론적 답변을 내놓고 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불교가 당시의 圖讖, 巫卜에 영합하여 참다운 인간의 覺性을 깨우치려는 교리와 연구, 수행에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오늘 날 한국불교도 내외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본다. 內는 불교 내부의 미신적 경향이고, 外는 새로운 사조에 의한 宗敎 哲學의 도전 이라는 것이다.
유불에 대한 비교론적 논술인 1, 2장을 제외한 나머지 8편의 글은 각각 독립된 논문들이다.
모두 불교에 관한 것이지만 논점에 순수 종교 보다는 철학적 측면이 강하다. 이런 점에 독특의 妙가 있다. 그리고 理通氣局과 一心二門의 실천적 수행을 중심으로 <율곡과 원효>를 비교한 연구는 학자, 불교인이면 필독해야 할 업적물이라 하겠다. (끝)
(2015.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