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중에도 냉방기는커녕 선풍기도 안 돌리고 부채를 부치며 파리채를 들던 영웅, 그의 육신은 우리 곁에 영원히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여혼은 불멸의 기상으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수재, 경북 산골의 한 소년은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대구에 가서 사범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한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태산 같은 걱정거리가 앞에 가로 놓인다. 사범학교이기에 일반 중학교 보다는 학비가 덜 들지만 열 식구 대가족이 겨우 남의 땅 열 마지기로 끼니를 이어 가는 처지에 월사금이다 하숙비다 이거 감당 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일제시대 사범학교는 웬만한 성적이면 학교에서 교비가 지급되었지만 이 촌뜨기 소년으로서는 교비를 탈만큼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일반 하숙이 아니라 학교 기숙사였지만 기숙사비는 내야했다.
이 공납금을 제때 낼 수 없었던 소년은 수시로 결석을 하고 집에 와 돈이 마련될 때까지 한달이고 두달이고 기다려야했다. 기숙사에서도 눈칫밥을 먹어야했고, 출출한 밤에 아이들끼리 추념을 해서 군것질을 할 때는 슬며시 홀로 밖으로 나가 어둔 밤하늘만 쳐다보다가 일이 끝난 다음에 방에 들어가곤 했다.
가난한 소년의 가슴에 한 맺힌 멍이 드는 노릇이었다.
그 소년, 그가 26년 전 궁정동 총성과 함께 저 세상으로 떠난 우리의 영웅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시절 일제의 皇民化교육에 절어서 文民出世보다는 武藝에 마음을 두고 심신 단련과 함께 민족의 장래에 대비하는 연찬(硏鑽)기간으로 생각하며 청년기를 맞았다.
그러기에 그는 학과 공부보다 검도나 교련 그리고 나팔과 같은 무예를 닦음에 학과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꼴지 졸업생이라 불리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당시 엄혹한 사범학교 교육, 그것 이수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회적 지도자감은 되었기에 당당히 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한다.
첫 부임지는 문경심상소학교. 그는 거기서 3년을 의무봉직하고 분필을 놓았다. 속에서 싹 트던 민족의식이 서서히 표출되기 시작, 아이들이 학교 숙직실에 놀러오면 "우리는 조선사람 이다. 우리글과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며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주셨다고 제자 이종기(67)씨는 증언했다(<내무덤에 침을 뱉어라>1998,조갑제 저).
어린시절 동네 아이들과 병정노리(헤이따이 곡꼬)를 즐기며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를 탐독한 그에게 분필보다는 긴 칼이 더 좋았다.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그는 1940년 봄 문경역 플래트폼에서 “늙은 에미 혼자 두고 우째 멀리 가려는교” 눈물 훔치는 어머니의 모습을 뒤로한 채 북상 열차에 올랐다. 아버지 박성빈은 그 전 전해 작고하셨다.
당시의 만주국 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 겨울이면 영하 20 30도의 혹한 속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일본 육사 교본 그대로의 학과교육과 야외훈련으로 240명 중 3년 수석졸업을 하고 1942년 다시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 1944년 4월 육사 57기 유학생대 3등으로 졸업한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로 복귀하여 7월 熱河省 만리장성 바로 북쪽의 보병 8단에 배속되어 모택동의 팔로군과 대치하게 된다. 훨씬 남쪽의 한만국경에 출몰하던 이른바 김일성빨치산부대는 이때 거의 와해되어 러시아령으로 잠적한지 한참 뒤였다.
이 엄연한 현대사로 미루어, 요새 공산분자들이 박정희 소속 일군이 소위 김일성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식의 왜곡 선전은 과연 역사 날치기의 금메달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한참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17년 11월 14일(음 9. 30.).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산촌의 한 작은 농가에서 동학교도 朴成彬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정희는 어쩌면 어머니 白南義의 모태에서 이승을 보지 못한 채 사산될 번한 고비를 수 없이 넘기고 우리 앞에 나왔다.
당시 여자 나이 45세면 벌써 할머니였으므로 백남의는 가난하기도 하려니와 막내아들과 맏손자에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집안에서 함께 젖을 빨린다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어머니 백남의는 낙태시키려고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디딜방아 틀을 끌어안고 고꾸라지기도 하는 등 갖은 위험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미래 민족의 은인 박정희는 타어나고야 말았다.
이것은 박정희라는 한 인간의 운명이전에 그가 처한 한 공동체의 운명과 연을 맺는 天命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결코 운명론을 이야기하고자 해서가 아니다.
만일 백남의라는 한 구시대의 여인의 모태에서 태아 하나가 죽어 사산 되었더라도 5.16이 있었으며 김일성을 압도한 부국강병이 가능했으며 오늘의 풍요를 가져온 大韓民國이 건재 했겠는가를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
韓民族 역사에서 얻은 교훈으로 文民 가지고는 이 민족을 다스리고 나라를 번영시킬 수 없다고 결의한 박정희는 그의 저서 <民族의 底力>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거듭되는 외침의 수난 속에서도 민족의 자기보존과 발전에의 끈질긴 의지가 꺾여본 적은 없다......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반도국가로서,오랜 역사를 통해 그만큼 숱한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끝내 자기를 지킨 강인한 생명력이야말로 세계사상 드물게 보는 驚異요 소중한 자산이자 저력이라하지 않을수 없다.
더구나 문화적으로도 우수성을 자랑하는 민족인데 어째서 후진의 굴레를 벗지 못한 채 民生이 饑饉선상에 있고 국가는 百尺竿頭에 서 있단 말인가!“
박정희는 마침내 헌법을 깨고 이러서며 외쳤다. “내가 잘못 했다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18년간 조국과 민족에 봉사하고 한줌 흙으로 도라 간 恩人 박정희는 무덤 속에서 다시 외친다. 草根木皮란 말이 두렵거든 “겨례여 내 무덤을 딛고 다시 일어서라”고....
05/ 9/ 22 안중헌 감사합니다.
해마다 이맘때 되면 생각 나서 암울했던 노무현 시절의 글 무수정 재록해 봅니다. 2010.9.13.